종실스님의 편지 한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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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이학종
1999년 10월 212호
“한 번만이라도 하루 네 시간 푹 자 보았으면 좋겠어요.”
대전발 서울행 열차를 타고 올라 오는 도중 종실스님은 쏟아지는 졸음으로 마냥 내리 깔리는 눈꺼풀과 싸우며, 터져 나오는 하품을 겨우 참은 채로 한마디를 했다.
“스님, 그러지 말고 잠시 눈을 붙이세요. 잠깐의 단잠이 피로 회복에 큰 효과가 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두 해 전쯤, 대전 지역에서 청소년 포교에 여념이 없는 종실스님과 함께 서울에 올 때의 이야기다. 어찌나 바쁘게 사는지 잠을 하루 네 시간도 못 잘 정도란다. 그래서 그런지, 스님의 얼굴은 몇 끼를 족히 굶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야위었다. 하기야 얼핏 보아도 연화사 신축불사를 진행하랴, 대전 지역 청소년 지원봉사센터를 운영하랴, 눈코 뜰 새가 없으니 그 숨가쁘게 가는 일정에 어디 한가하게 눈 볼일 틈인들 있었으랴. 그 날도 대전광역시 청소년봉사센터를 맡아 운영하는 문제와 청소년교화연합회와 관련한 일을 보기 위해 두세 개의 일을 모아서 서둘러 서울로 향하는 중이었다.
종실스님과 내가 첫 대면을 한 것은 10년 전인 89년쯤으로 기억한다. 스님은 그 무렵 대전의 한 변두리에서 자광사라고 하는 절을 4층짜리 작은 건물 꼭대기 층에 전세를 얻어 운영하면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포교에 전념하는 중이었다. 수습 기간을 갓 벗은 초년 기자 시절이던 터라 매사에 열의와 적극성이 넘쳐흘렀을 시절이니, 한 걸음에 대전 자광사로 달려갔던 기억이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 날의 행사는 시각 장애 학생들의 모임인 ‘아나율 학생회’ 회원들이 모여 장기자랑도 하고, 발원문도 낭독하고, 부처님도 찬탄하는 발표회였는데, 행사를 주관해 진행하는 종실스님의 모습이 어찌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 나는 그 날의 광경을 주저 없이 ‘스님은 보현보살의 화현이었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해 보도하였다. 나중에 스님으로부터 ‘지나친 칭찬은 오히려 욕’이라는 꾸지람(?)을 듣긴 했지만, 만일 지금 또 다시 그 기사를 작성하라고 하면 ‘종실스님은 보현보살 이라고 단정지을 것이리라.
그 일이 있고 몇 년이 흐른 뒤 나는 종실스님에게서 난데없이 그때 기사를 잘 써주어서 너무나 큰 도움을 받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도대체 그 기사로 인해 어떤 도움을 받았느냐고 되묻자, 기사를 보고 치과의사 한 분이 찾아와 시각 장애 학생들의 치아 건강 치료를 전담해 주고 있다고 하였다. 시각 장애인들 대부분이 충치 등의 치아 질환을 앓고 있기 때문에 아나율 학생회 회원들도 치아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심하다는 것과 뜻 있는 치과의사가 있다면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흘리듯 하신 말씀을 기억해 기사 말미에 치과의사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내용을 덧붙였던 것인데, 부처님의 가피가 있었는지 기사를 보고 훌륭한 치과의사 한 분이 찾아와 벌써 몇 년째 도움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도 종실스님을 쭉 지켜본 나는 이런 분이 한국불교에 백 명, 아니 단 열 명만 더 계신다면 한국불교가 달라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스님이 하는 일이면 그 의중을 잘 파악해 정성껏 기사를 작성하곤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종실스님도 불사를 하거나 어떤 일을 새롭게 계획할 때면 늘 나의 의견도 묻곤하여, 지중한 인연을 쌓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가끔씩 대전을 내려가는 일이 늘어났고, 그 때마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새 직업으로서보다는 불교 개혁이나 불교운동차원에서 기자생활을 하겠다는 나의 초발심을 내심 다잡곤 했다.
지난해 여름에 본의 아니게 신문사를 떠나야 하는 고통을 겪었다. 지금은 복직이 돼 다시 일을 하고 있지만 타의에 의해 신문사를 나왔을 때의 고통은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예닐곱 달 동안을 실업자 아닌 실업자 신세로 떠돌았는데, 결코 길지 않은 그 기간 동안 나는 정말로 귀중한 공부를 많이 했다. 기자로 재직하는 지난 10여 년 동안 자신도 모르게 생겨난 좋지 않은 습관들, 예컨대 공연히 건방을 떤다든가, 기자라는 신분을 들어 어디를 가든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든가 하는 등의 잘못된 관행들을 돌아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공무원하고 기자는 그만두고 나면 마땅히 할 일이 없고, 또 사업을 하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는 말들을 익히 들어 왔고, 스스로도 이러한 점을 감안해 늘 조심을 한다고 했는데 모르는 사이에 ‘기자입네’하는 습관이 배어 있었음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 기간 동안에 만났던 사람들의 태도가 기자로 재직할 때와 다르다는 점을 느낄 때마다 마음속으로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참회진언)을 되뇌이곤 했는데, 지금도 이것이 습관이 되어 어떤 일을 하든 바로 되돌아보고 개운치 않은 면이 있으면 참회진언을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게 신문사에서 ‘쫓겨난’ 뒤 청진동의 한 허름한 건물에 월세로 방을 하나 얻어 놓고, 작은 가스난로를 틀어놓은 채 겨울 추위를 견뎌 가며 복직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던 어느 날, 문득 종실스님의 전화를 받았다.
“이 기자님,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신문사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요. 마침 서울 갈 일이 있는데 꼭 만났으면 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스님과 점심을 하는 동안 ‘내가 또 공연히 스님에게 걱정거리 하나를 더해 드렸구나’라는 생각에 죄송스러운 마음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격려와 위로,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를 더 열심히 하라는 말씀, 아마도 부처님의 가피로 모든 일이 잘될 것이니 너무 상심하지 밀라며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하겠다는 말씀을 들으며 문득 눈가에 물기가 맺히기도 했다.
한 시간 가깝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뒤 헤어지는 시간이 되자 종실스님은 내 손에 작은 봉투를 하나 쥐어 주셨다. 이러실 필요가 없다며 거절을 해 보았지만 “내 마음이니 너무 사양치 마시고 받아 두라”는 권유를 끝내 뿌리치지는 못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와 열어 본 봉투에는 빳빳한 신권의 금일봉과 정성을 담아 써 내려간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는데, 편지를 읽는 동안 나는 다시 한번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저도 함께 부처님 전에 기도하겠습니다. 많은 도움을 주셨던 것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이 기자님이 해 오신 일들은 모두가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늘 현명한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광사 종실 합장.”
나는 이 편지를 몇 차례나 되풀이 해 읽었는지 모른다. 읽고 또 읽고, 스님의 과찬에 몸둘 바를 모르면서도 이렇게까지 나를 좋게 평가해 주신데 대한 고마움, 그리고 부끄러움에 그날 밤 잠을 설칠 정도였으니까.
나는 스님의 편지를 한동안 안방 창문 위에 붙여 놓고, 늘 마음가짐을 가지런히 하곤 했었다.
힘겹고 어려울 때 큰 힘이 되어 준 종실스님의 편지 한 통. 꼭 편지 때문만은 아니지만 종실스님은 나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큰스님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