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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꽃이어서 꽃이 보이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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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경문 2001년 04월 230호
하마 봄인가 싶어 문을 밀면 매서운 바람에 실려오는 답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눈에 덮여 꼼짝 못하는 앞산을 바라보자니 저 산이 도저히 진달래를 피워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고 터럭만큼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는 자연의 질서에 성급한 입맛을 다실 수도 없다.
지금 삼불봉 아래 이곳저곳에서는 눈 내려앉는 소리ㆍ얼음 부서져 흐르는 소리 부산하고, <동학>지 편집실 앞 좁은 화단에도 언 땅 밀어내고 올라온 복수초와 원추리, 그리고 돌나물 움트는 소리가 사방으로 번지고 있다.
남쪽에서는 매화가지에 꽃망울 터졌다는 소식이 왔다. 올해 같은 철한鐵寒을 견뎌낸 매화라면 분명 매서운 향기를 머금었을 것이다.
이제 곧 수묵화 같은 저 숲에도 물이 오르기 시작할 것이고 초록빛이 점점 확장되면서 진달래, 복숭아꽃, 오얏꽃이 질펀하게 꽃 잔치를 벌일 것이다.
이 때가 되면 동학사 입구의 이십 년을 묵은 아름드리 벚나무도 편안하게 가지를 늘어뜨리며 사람들에게 꽃길을 내 준다. 햇빛을 먼저 받는 주차장쪽 가지 끝에서 신중한 몸짓으로 한두 개의 꽃이 피기 시작하면 박정자 입구까지 만들어지는 꽃 터널에 선홍색 꽃빛이 일제히 번진다.
학인 스님들은 보름에 맞춰 일찍 저녁 방선을 하고 달빛따라 그 꽃길을 찾아 나선다. 벚꽃 위에 달빛이 내려앉으면 꽃으로 된 하늘이 한 겹 더 생기게 되는데, 어느 시인의 말처럼 보이는 것이 온통 꽃이어서 꽃이 보이지 않는다. 그 꽃하늘 사이로 고개 내밀고 산을 찾으면 뭉뚝한 붓처럼 생긴 문필봉이 솟아 있고 그 위로는 별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정황들을 뒤로 하고 돌아오다가 변덕스런 봄날씨의 복병, 비라도 만나게 되면 젖는 사람보다는 비에 떨어져 버릴 꽃이 큰 걱정이다.
세상에 뜻이 없어 산에 은거하며 자연과 벗삼아 지냈던 시인 맹호연孟浩然이 떠오른다. 그 역시 게으른 봄날 늦잠에 빠져 있으면서도 봄비에 떨어진 꽃잎 걱정을 하는 사람이었다.

춘면불각효 春眠不覺曉
봄 잠에 취해 날 밝은 줄 모르다가
처처문제조 處處聞啼鳥
사방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을 깬다
야래풍우성 夜來風雨聲
밤에 비바람 소리가 들리던데
화락지다소 花落知多少
꽃이 얼마나 떨어졌을지
나가봐야겠다.

이 시인은 뒤에 산을 내려와 당시 시불詩佛이라 불리며 산수화에도 뛰어났던 왕유王維와 지음知音했던 사람이다. 세속에 살면서도 세속에 속하지 않고 한적한 자연의 정취를 사랑했던 성당盛唐 때의 유명한 자연 시인이다.
봄이 되면 계룡산 주변의 크고 작은 숲에는 자생하는 산벚나무가 많아 산색이 매우 아름답다. 섬진강을 따라 놓인 쌍계사 벚꽃길도 알려져 있지만 점점이 산을 에운 산벚꽃들의 아련한 꽃빛도 사람들을 봄에 취하게 하기에 넉넉하다.
옛부터 산이나 마을 부근에 절로 났다는 벚나무는 산앵山櫻이라고도 불리는데 종류도 많다. 잎벚나무, 개벚나무, 털벚나무, 잔털벚나무… 칠월에 흑자색으로 익는 열매는 ‘버찌’라고 하여 맛이 좋다.
벚나무 이야기라면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고려 때 국난 극복의 정점이 되었던 남해분사대장도감南海分司大藏都監과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이다. 그 재료는 산벚나무가 주종이다.
부인사의 대장경판이 소실되고 몽고병의 침입을 당하게 된 고려는 그 국난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대장경 판각불사의 대원을 세운다. 먼저 수기守其 스님을 중심으로 힘을 모은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는 흩어졌던 대장경을 수집, 교감校勘하고 새로 대장경에 재조再雕 될 경전의 선정 작업을 한다.
한편에서는 경을 옮겨 새길 재목으로 벚나무, 돌배나무, 자작나무 등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들 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뱃길이 용이한 제주도ㆍ남해ㆍ거제도 등의 야산이 채벌지로 정해진다. 남해에 설치되었던 분사도감의 지리적 관건도 여기에 있다. 채벌된 이 나무들은 일단 병충해와 부패방지 등을 위해 바닷물에 들어간다. 결을 곱게 삭이기 위해서라도 바닷물에 오래 담궈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수에 절여 결이 고르게 되면 그 나무들을 건져다가 일정한 크기로 결에 따라 자른다. 자른 목판들을 다시 그늘에 말려서 대패질을 한다. 대패질을 끝으로 연판練板 작업이 모두 마무리되면 선정된 경의 순서에 의해 목판에 새겨 넣는다. 이렇게 조조雕造된 경판의 숫자가 81,137개이다. 18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조각도에 혼을 넣어 한 획 한 획 벚나무와 돌배나무ㆍ자작나무판에 새겨 놓은 민족의 역사 고려 대장경은 오늘날 해인사에 보관되어 인류에게 정신문화의 빛이 되어 주고 있다.
언젠가 법정 스님의 글에서 읽은 기억인데, 자연 염료를 채취하여 옷감에 염색하는 것을 연구하는 사람의 얘기였다. 봄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가지가 꺾인 벚나무 몇 줄기를 주워다가 솥에 넣고 옷감과 함께 삶았더니 벚꽃과 똑같은 담홍색 물이 들더라는 것이다. 꽃만이 아니고 딱딱한 껍질의 가지까지 같은 빛깔의 몸뚱이를 간직하기 위해 안으로 잔설의 고통을 수용하고 밖으로 말없이 그 빛을 발해 낸 자연의 경이에 소리없는 탄성이 나왔다.
자연은 참으로 위대하여 침묵하는 가운데 이토록 많은 일들을 해내고 있고 아직도 자신들의 질서에 순응하며 사람들 앞에 서 있다.
봄을 포장, 수식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했던 벚꽃도 이제 또 그 침묵의 질서에 의해 조용히 꽃의 시절을 마무리 할 것이다. 필 때에 거드름이 없었듯 질 때에도 그저 바람에 몸을 조각내어 이리저리 굴러 다니다가 사람들의 발 밑으로 사라지거나 다시 뿌리에 투신하여 내년 이맘때가 되면 새로운 꽃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꽃 뚝뚝 떨어져 내린 그 자리엔 푸른 잎들이 새 생명의 싹을 틔울 것이다.□

※ 편집자 주 : 경북대 박상진 교수에 의하면 고려대장경 판각재료는 벚나무 62%, 돌배나무 13%, 자작나무 8% 그외 기타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