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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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 황충상
1991년 04월 110호
“스님, 새벽 문안 드립니다.”
노승은 가슴이 철렁하도록 놀랐지만, 이내 그 음성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돌아서며 마음을 놓았다.
허나 마음을 놓는다는 것은 오히려 붙드는 것이 아닌가.
“보살님, 어인 일로 이 새벽에 암자까지 오르십니까?”
노승은 차마 ‘남의 이목도 생각 하셔야죠’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어제 영감 사십구재를 모신 노보살은 깨끗한 소복차림으로 환갑이 지났을 나이답지 않은 걸음 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복 받은 보살이야, 저토록 정정 하다니.’
초상을 치룬 후 어제 사십구재까지 영감의 명복을 벌기 위해 절에서 기도로 살다시피하는 노보살의 정성이 노승 자신과는 무관할 지라도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어제 재를 마치시고도 하산하 시질 않으셨군요”
노보살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 동안 기도로 무리했던지 몸 살기가 좀 있어 며칠 쉬었다 가려구요.”
“보살님 신심이야 어련하시겠습니까만, 본시 늙은 육신이란 후손의 보살핌이 앞서지요 어서 내려가 탕제라도 드시는 것이 심신에 이로우십니다.”
“스님께서 하산하랍시면 오늘이 라도 당장 내려가야지요”
노보살은 숨이 차는지 잠시 말 올 멈추고 보자기에 싸 들고 온 찬 합을 마루에 올려놓았다.
“몸도 펀치 않으시다면서 무얼 가져오셨습니까?”
“스님 죄송합니다. 어제는 영감 천도재를 지내고도 가솔돌 치닥거리 때문에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따로 며늘아이에게 스님께 올릴 음식을 좀-부탁했지요 오기 전에 부처님께 먼저 공양을 올린 음식이오니 드셔보시죠.”
“어허 괜한 수고를 하셨습니다. 소승은 화식을 끊은 지가 오랩니다. 끄르지 마시고 대중들이 나눠 먹도록 하시지요”
“화식을 끊으셨다는 말씀을 듣고 잣가루와 인삼가루를 꿀로 환 올 짓도록 하였습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당치 않은 음식입니다. 심지가 다 된 불 길에 기름을 부은들 무엇에 소용 합니까. 차라리 젊은 승려들이나 먹고 용맹정진에 쏟을 힘이 솟게 하시지요 소승에게는 솔잎가루 한 줌과 불련 생쌀 한 줌이면 하루를 족합니다.”
“스님의 수도생활이 어찌 청정 한 줄 모르리까, 하지만 특별히 정성이 담긴 음식이오니 물리치지 마십시요”
노승은 더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밝아오는 동녘을 향해 눈길을 옮길 뿐이었다. 노보살은 아무래도 노승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으리라는 생각을 앞질러 하지 않은 바가 아니었지만 마음이 아프고 야속했다.
“더는 권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부탁을 드리겠어요 이 음식을 잠시 맡아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내려가 행자님을 시켜 대중공양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노승은 뜨악한 표정으로 노보살을 내려다보았다. 노보살은 노승의 눈빛이 싫은지 원망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그도 싫으신가요?”
“모처럼 보살님 답지 않으신 말씀을 듣겠군요. 언젠가 보살님께서는 손수 낱알로 정선한 공양미를 머리에 이고 일주문을 들어서 셨지요. 마침 마당을 쓸던 행자가 뛰어가 공양미 자루를 받아 들려 했을 때 하신 말씀 기억나십니까? ‘행자님, 보살의 일은 보살에게 맡기시고 어서 부처님 되시어 이 미욱한 보살을 제도하십시오.
지금도 소승의 귀는 그 법문의 말씀을 쟁쟁히 듣습니다. 그러셨던 보살님께서 오늘은 어인 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노보살은 찬합을 싼 보자기를 만지작거리며 어렵게 노승의 말을 받았다.
“스님, 용서하십시오. 저 또한 스님의 법담을 문득 떠 올렸습니다. 스님께서 암자로 처소를 옮기기 전 본사(本寺) 주지스님으로 계실 때, 제가 세정범사에 시달리다 못해 스님을 찾아 봐온 적이 있었지요 그때 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서면 힘도 섭니다. 허나 마음이 쓰러지면 힘도 쓰러지고 마는 법이지요.
보살님 번뇌가 심하시더라도 그럴수록 번뇌에 눌리지 마시고 마음을 일으키십시오’ 스님, 저는 그 말씀을 의지해 일어서고 싶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스님께 공양을 올릴 마음이 섰을 때는 이 찬합이 전혀 무거운 줄 모르고 암자까지 들고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 이 음식을 물리 치신 순간 저는 마음이 쓰러져도 저히 찬합을 들고 내려갈 힘을 낼 수가 없군요.”
“보살님의 그 자비심의 근본을 소승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이 음식은 소승이 다 먹은 거나 진배 없습니다. 그런 줄 아시고 환회심을 내시어 본사로 가지고 돌아가시지요
서서히 동녘하늘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침 햇빛은 고희(古隔)로 접어드는 노승과 이순(耳順)을 지났을 노보살의 얼굴 윤곽을 또렷이 비추어 서로의 내변을 읽게 만들었다.
“스님, 단 하나만이라도 뜨시지요 그러시면 스님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비로소 노승은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보살의 손이 잽싸게 보자기를 끄르고 찬합을 열었다.
잣가루와 인삼가루를 꿀로 빚은 환은 챈 겨란의 노른자 크기만 했다. 그것들이 눌리어 보기 싫게 될까봐서 3충 나무 찬합에 담아온 것이었다. 노보살은 환 하나를 들어 두 손으로 노승에게 내밀었다.
노숭은 환을 받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다가 삼켰다.
“스님, 맛이 괜찮으신지요?”
“정성의 맛이야 말로 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저 마음으로 황감해 하고 고마워할 뿐이지요”
“스님, 고맙습니다. 이제사 제소원을 푼 듯싶습니다.”
“소원을 푼 듯싶으시다면, 필시이 음식에 사연이 있으신 게지요?”
“스님, 이 말씀은 언제까지나 제 가슴에만 담아두려 했습니다.”
노보살은 말을 끊고 무표정한 얼굴로 노승을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음식은 제 며늘아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제 딸아이가 바로 스님의 따님이 정성껏 만든 것입니다.”
노승의 왼쪽 눈시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어 그 경련은 우수의 그늘과 함께 노승의 입가로 옮겨갔다. 노승은 가슴 속의 어떤 말을 어렵게 삼키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끝내 한 말씀도 아니 계시군요 내내 법체(法體) 명강하옵소서.”
노보살은 젖은 음성의 말을 남기고 찬합을 든 몸을 어렵게 가누며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노승은 망연히 노보살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다 초여름 하늘에 걸린 구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노승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구름 속에서 20대의 자기 모습을 발견했다.
신혼 초 학병(學兵)으로 끌려가다 산문으로 탈출한 노승의 청년시절 얼굴 위로 노보살의 옛된 신부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