ㄷ. 이해하기 어려운 경
부처님 멸도 후에 「법화경」을 펴는 법사라 해도 기실은 범부들이므로 부처님의 혜명은 범부들 손에 내맡겨져 있음이 되거니와, 그러면 「법화경」은 어떤 경인가.
‘내 설하는 경전이 무량 천만억이니 이미 설한 것, 이제 설하는 것, 장차 설할 것들 이 중「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이해키 어렵니라. 이 경은 곧 제불(諸佛)의 비밀한 법장(法藏)이라, 분포(分布)하여 함부로 사람에게 가르칠 일 아니니, 제불에 의해 수호 될 뿐 예로부터 드러내 설해짐 없느니라.
더욱 이 경은 여래 계신 지금에도 적이 많거든, 하물며 멸도한 뒤일까보냐.’
이 글에는 검토되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으니, 그 첫째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설하신 불경 중에서,왜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냐 하는 점이다.
이는 다른 경전들과 우열을 비교한 끝에 「법화경」이 제일이라고 단정하심이 아니라, 경들을 대립(비교)이전의 불의(佛意)로 되돌림으로써 모든 경전이 기실은 하나임을 ‘밝히신 것이 「법화경」이므로, 그래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진다는 뜻이시다. 사실 경전 하나 하나의 내용도 알기는 어려운 터에, 다시 그것들이 하나인 도리를 밝히심이 「법화경」이라면, ‘가장 믿기 어렵고 이해키 어려울’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만일 다른 경과 비교하여 「법화경」이 제일이라는 견지에 선다면, 「법화경」 하나만을 취하고 다른 경전들은 무조건 배격하는 일련 종처럼 될 것이니, 이것처럼 「법화경」의 취지와 상반되는 것도 다시 없을 것이다.
둘째는 어째서 ‘함부로 사람에게 가르칠 일 아니다’라 하셨느냐는 점이다. 앞에서는 「법화경」을 설하라 적극적으로 권장하셨기에, 더욱 의문은 가중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앞의 인용문 위에 ‘제 불의 비밀한 법장이라’는 말씀이 있었고, 또 뒤의 ‘제불에 의해 수호 될 뿐 예로부터 드러내 설해짐 없느니라’의 글로 이어지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 모름지기 부처님의 뭇에 따라 설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신데 지나지 않으므로, 조금도 모순을 빚는 것은 아니다.
흔히 「법화경」을 받드는 사람들은 이 경을 만병통치약쯤으로 알아 누구에게나 무턱대고 「법화경」을 강요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의 근기에 여러 가지가 있음은 오늘이라고 부처님 당시와 다를 것이 없고, 아니 그때보다도 현저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음을 부정 못한다 할 때, 「법화경」하나만으로 교화하려는 것에는 처음부터 무리가 있다 해야 한다.
따라서 부처님이 그러하셨듯, 「아함경」이 어울리는 사람에게는 「아함경」을 설하고, 「금강경」에 해당 하는 근기라면 「금강경」으로 교화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도리어 「법화경」의 정신이다. 부처님이 오십 년이나 방편으로 교화하시다가 끝에 가서야 밝히신 진실이 「법화경」이라면, 오늘의 법화행자에게도 요구되는 것은 그런 참을성과 방편력일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는 「법화경」의 일대사인연을 이해하도록 유도함이 그 포교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아무에게나 「법화경」을 적용하면 되는 줄 안다면, 이는 모든 경전을 하나로 보는 「법화경」의 정신도 알지 못한 것이 될 것이니, 그런 처지에서라면 독선의 길밖에 갈 때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셋째로 구명돼야 할 것은, ‘이 경은 여래 계신 지금에도 적이 많거든, 하물며 멸도한 뒤일까보냐’라 하신 말씀이다. 어째서 「법화경」을 받드는 사람들에게는 척이 많은가.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법화경」이 온갖 경전들의 특수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선 정이다. 물론 부정했다고는 하나 무턱대고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제한되어 있는 특수성들을 일불승이라는 보편적인 바다 속에 용해 시킴으로써 보다 완전하게 만들었으므로, 그 특수성 속에 깃든 중대한 의미를 파헤치는 것에 의해 특수성을 진정으로 살련 것이 된다. 그러나 그 같은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부정인 듯 받아들여질 공산은 크니, 이것이 적이 많은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경들 사이의 적대관계를 해소 시키는 가르침에 대해, 제것에만 매달리는 측에서 일으키는 반발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
그렇다고 이것만이 적은 아니어서, 「법화경」을 받드는 사람 중에 도적은 있다. 곧 「법화경」만이 제일이라 하여 다른 경을 배격함이 그것이니, 그 편벽된 소견머리가 「법화경」에 대한 옳은 이해를 저해하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무서운 적임이 될 뿐 아니라, 이들은 대개 광신의 열기에 들떠 있기에 반항세력을 키워 박해를 자초하기에 이르는 수가 많다. 그러기에 「법화경」에 있어 경계해야 할 것은 「법화경」올 독선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니, 이들이야말로 사자신중충(師子身中壘)이다.
사람마다 법사가 되어 「법화경」올 펴라 하시나, 「법화경」은 이렇게나 이해하기 어려운 경이다. 그러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설하라는 말씀과, 함부로 설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같은 취지였음을 알게 된다.
ㄹ. 우물을 파는 비유
「법화경」이 이렇게나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경인 만큼, 그러기에 이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아녹다라삼막삼보리에 다가선’ 것이 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같은 도리를 비유로 설하시니, 그것이 곧 고원에서 우풀을 파는 비유(고훤착수유)다.
‘비유컨대 사람 있어 목말라 물을 찾아 고원에서 땅을 파되, 마른 흙만 나오면 물 아직 먼 줄 아나, 자꾸 파 습한 흙 뵈어 마침내 진흙에 이르고 보면, 그 마음에 반드시 물이 가까움을 아는 것 같으니라.’
최고의 깨달음(야욕다라암약삼보리)을 물이라 할 때, 우리네 범부는 물기라곤 조금도 없는 고원에 서있음이 된다. 그러나 어떤 땅이라도 그 밑에는 물이 있는 것처럼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기에 그 불성의 충동에 의해 보리심을 일으켜서 수행에 착수한다면, 이것은 곧 물을 찾아 고원을 파 들어 가는 일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하여 물과의 거리에서 세 가지 차등이 생기니 천태대사의 교판(觀)을 빌리자면 마른 흙만 나오는 것은 중도의 도리라고는 조금도 없는 아함시(소송)의 단계요, 습한 흙이 보임은 방편의 가르침 속에 중도의 도리가 섞여 있음을 이르므로 방등시 ·반야시의 경지인 데 비해, 진흙은 중도실상이 드러내놓고 설해진 비유이므로 「법화경」의 가르침인 것이 되니, 그것이 최고의 깨달음에 다가선 경지일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口. 어떻게 설할 것인가
그러면 「법화경」을 홍포하는 법사가 갖추어야 할 자격은 무엇인가.
‘여래의 방에 들며, 여래의 옷 걸치며, 여래의 자리 앉아서야, 비로소 그들(사부대중) 위하여 이 경 널리 설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스스로 해석을 가하사 ‘여래의 방이란 온갖 중생 감싸는 대자비심, 여래의 옷이란 유화인욕심, 여래의 자리란 온갖 것이 공하다는 도리’ 라 하셨다.
아무리 법사라 해도 편애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우니, 가족·친척 ·향리 ·민족·국가 따위에 따르는 차별이 따라붙는 것이 범부의 숙명이다. 이에 비해 그런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계신 것이 부처님이시므로, 부처님의 자비는 누구건 거부하지 않는 방인 것이 된다. 아니, 등을 돌리건 말건 모든 중생은 처음부터 부처님의 방안에 있는 부처님의 식솔인 것이니, 그러기에 이런 자비를 본받는 것이 법사가 갖추어야 할 기본요건이 된다.
또 옷은 추위나 더위를 막아 주는 점에서 인욕에 어울리니, 인욕이란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부처님은 비난에도 반용이 없으시고 찬탄에도 통요함이 없으셨다 하거니와, 법사가 역경이 닥칠 때마다 허겁지겁하고, 남이 칭찬한다 하여 우쭐해 한다면, 어떻게 법을 펼 것인가. 그러므로 인욕을 지니도록 요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은 언제나 공 속에 앉아 계실 뿐이니, 깨달으시되 깨달음 또한 공하다 하여 거기에 머물지 않으시며, 중생을 교화하시되 그 같은 불사 또한 공하다 하여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상(相)에서 벗어난 이 같은 공이 법사의 또 하나의 요건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부처님을 따르는 것에 의해 그 뜻을 제 몸에 실려가는 일이 법사가 구비해야 할 요건이 됨이니, 자리와 이타가 하나여서 그 이타(포교)의 실적은 자리(수행)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