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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속으로 사라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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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윤청광 1999년 10월 212호
요즘은 세상 인심이 고약해져서인지 스님들의 탁발마저도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래서 수행의 한 방법인 탁발을 아예 금지시키는 종단까지 있는 세상이 되었다.
왜 탁발마저 금지시키게 되었으며, 탁벌이 어떤 부작용을 일으켰는지는 굳이 따지고 싶지 않지만, 한 조각 뜬 구름처럼 이 마을, 저 마을로 표표히 흘러가며 한줌의 쌀, 한줌의 겉보리를 탁발하던, 어딘가 쓸쓸해 보이고 어딘가 멋있어 보이고, 어딘가 말할 수 없는 존경심을 자아내던 그런 스님의 모습은 이제 바라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끝없이 펼쳐진 논둑길, 아름답게 번져 가는 노을 빛 속으로 바랑 하나 걸머진 채 사라져 가던 탁발 스님의 그 경건하고 겸허한 뒷모습은 이제 만나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우리나라는 정말 너무너무 가난하고, 헐벗은 백성뿐이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쑥을 뜯어다가 죽을 쑤어 먹는 게 고작이었고, 언제나 허기진 우리는 앞산이나 뒷산에 올라가 소나무 가지를 꺾어, 가죽을 벗겨내고 소나무 단물을 빨아먹는 게 유일한 재미요, 낙이었다.
지금 같으면 돼지도 닭도 먹이지 않을 깔깔한 밀기울, 보리겨로 개떡을 만들어서 그것도 한 개만 더 먹었으면 하고 늘 군침을 흘려야 했던 소년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뼛속끼지 사무친 가난이었고, 뼛속까지 한이 맺힌 굶주림이었다.
온 나라가 온통 이렇게 비참한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을 때였으니, 이름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골 구석의 조그마한 암자에 어느 누가 시주인들 변변하게 할 수 있었으랴.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면 용당리, 우리 집에서 시오 리쯤 떨어진 바닷가 벼랑위에 축성암이라는 조그마한 암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 무렵 그 절에 계시던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스님 한 분이 어쩌다 한번씩 탁발을 하러 마을에 들르시곤 했다.
그러나 너나 없이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절이라 어느 집에서 선뜻 쌀 한 줌은커녕 보리쌀 한 줌도 시주를 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스님은 늘 허탕을 치기가 일쑤였다.
사립문도 없는 마당 앞에 서서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림처럼 우뚝 서서 근엄한 목소리로 염불을 외우고, 그래도 집안에서 인기척이 없으면 목탁을 두어 번 치고 두 손을 합장하여 집안을 향해 인사를 드리고 쓰다 달다 말 한마디 없이 돌아서던 그 스님이 어찌 보면 안됐다 싶기도 하고, 어찌 보면 왜 저렇게 헛고생만 하고 다닐까 싶어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때도 아마 보릿고개였다고 생각이 든다. 어머니께서는 어디 나가시고 집안에는 나와 어린 동생들뿐이었는데, 가끔씩 내려오시는 그 스님이 우리 집 마당 안에 두어 걸음 들어서서 그득한 목소리로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집 곡식 항아리에 곡식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오늘 밤에는 또 무슨 죽을 어떻게 끓여 먹을 수 있을지 걱정을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염불을 외우는 스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때 어머니가 어느 이웃집에서 겉보리를 한 바가지 꾸어 가지고 옆에 끼고 돌아오시다가 그만 스님과 마주쳤다.
스님은 염불을 마치고 마악 굽혔던 허리를 펴다가 어머니를 향해 다시 한 번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옆구리에 끼고 있던 바가지를 스님 앞에 기울여 내미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님은 바랑 입을 벌려 시주를 받을 생각은 않으시고 겉보리가 담긴 바가지와, 그 바가지를 들고 있는 우리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시주를 받은 거나 진배없습니다.” 하면서 다시 한 번 합장하며 허리를 굽히시더니 시주도 받지 않고 그 길로 발길을 돌려 골목을 빠져 나가셨다.
그 순간, 철없던 내 마음 속에는 뭔가 말할 수 없는 엄청난 감동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 꾸어 온 겉보리 바가지를 두 손에 든 채 스님이 사라져 간 골목길을 바라보고 계시던 어머니의 두 눈에 맺힌 이슬을 나는 보았다. 스님한테 시주도 못 하는 한 맺힌 가난과 굶주림이 어머니를 그렇게 슬프게 만들었던 것이었으리라.
그 뒤로도 나는 언제나처럼 축 처진 허름한 바랑 하나를 메고, 흘러가는 한 조각 뜬 구름처럼 휘적휘적 논둑 길을 걸어서 아름다운 노을 빛 속으로 사라져 가던 그 스님의 뒷모습을 종종 보고는 했는데, 언제부터 그 모습을 우리 마을에서 볼 수 없게 되었는지 이제 와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길이 없다.
꾸어 온 겉보리라는 걸 알아차리시고 차마 시주를 받을 수 없었던 그 자상한 헤아림을 지니고있는 그런 스님을 지금도 나는 만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