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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백가풍의 행운유수 (行雲流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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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명정 1991년 04월 110호
한 세상을 산다는 것은 길 떠난 나그네거나 또는 하룻밤 여관방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소동파도 ‘인생하자비거려(人生何者非邊魔)’라, 어느 누구의 삶인들 하숙생 아닌 자가 있겠는가 라고 읊조렸다.
행운유수(行雲流水)와도 같은 운수납자(雲水補子)들의 생활. 그렇게도 걸림 없는 무애(無碍)의 일상이지만 이 시대에서는 아무래도 환경문제와 맞물려 있는 것같다.
선방의 장래를 구참 수좌들이면 걱정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알게 모르게 그 좋았던 공간과 풍습이 순식간에 찌들고 침식당해 기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근엄하고 순수했던 청백가풍(淸白家風)이 산업화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듯한 느낌은 ‘시법법위주(是法法位住)하야 세간상상주니라’ 하신 경문의 구절이나 음미하고 있기엔 변해가도 너무 변한다 싶다. 호미 들고 밭 매고 선채(善財)처럼 끝없이 끝없이 흘러 다닐 수 있었던 시대는 무한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불과 20~30년 전 일인데 산업화에 밀려 그렇게 흘러다닐 수 있는 길도, 분위기도 없어졌다. 해변으로 산으로 며칠이고 몇 달이고 결제기간이 끝나고 해제철이면 발이 부르트도록 다녔다. 행선(行輝)과 또 만행(萬行)의 순례였다. 해변의 길손은 김신조 덕분에 철조망과 검문으로 그 즐거움도 끝나버렸다.
행선의 즐거움을 이야기하였더니 구산스님의 말씀, “예전에는 수좌가 행각을 할 때에 조실스님이 얼마를 걸어왔는가 물어봐서 30리 이상을 걸어왔다고 하면 밥도 주지 않고 쫓아버렸단다. 짚신만 떨구고 다니면 서 공부는 챙기지 않는 놈이라교” 행운유수, 구름처럼 물처럼 흘러다니는 뜨내기, 생각만 해도 의식 맨 밑바닥에서부터 풍겨오는 뜨내기의 땀에 절은 냄새, 결망쟁이, 유량잡승, 초라해 빠지고 가난해 빠진 타고난 거러지. 그래서인지 처음 절에 와서 부터 회색 진회색 먹물 먹인 무명옷이 미치고 환장하도록 좋았고, 큰스님·조실스님 명칭보다도 땡초, 땡땡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고소하고 향긋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그런 덕분에 40까지 선방에 다닐수 있었나 보다. 전생에 아마도 남사당 패거리였던가 아니면 평생을 벌어먹던 행각걸승이었나 보다.
지금도 동해변이나 전라도 어느 촌락 여염집 아낙에게서 밥 얻어 먹던 정경이 수채화마냥 아련히 떠오른다.
행결승은 진묵스님의 모친 제문에도 나타난다. 다음은 제문이다.

태중 열 달 동안의 은혜를 어떻게 갚으며
슬하에서 삼 년 동안 길러 주심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세를 사시고 또 다시 만세를 사셔도 자식의 마음은 오히려 싫거늘
어머님의 수명이 어찌 이다지도 짧습니까
단표(單瓢)노상에 행걸일승은 이미 그러려니와
비녀 꽂은 규중의 시집 안간 누이동생은 애처롭지 않습니까.
상단의 불공이 끝나고 하단의 시식도 끝나니 중들은 각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데
혼은 어디로 갔습니까 오호 애재로다!

이것이 진묵스님 모친의 제문 전문이다. 표주박 하나 차고 다니는 행걸일승이란 표현이 재미있고 말후(末後)의 한 구절 ‘앞산과 뒷산은 첩첩한데 혼은 어디로 갔는가 오호 애재로다! ’에서 부모의 은공을 다 갚은 것이다.
옛 조사들의 행각중엔 조주스님이 현란함 바로 그것이었다. 지대방 어록으로는 조주스님은 60실에야 겨우 발심 했다라는 말이 있다. 120세의 장수를 누렸는데 40년 정진하고 40년 행각하고 80세부터 120세까지 40년 동안 조주 관음원에 머물며 중생을 교화하셨으니 참으로 성당시대의 고불(古佛)이셨다.
육조 혜능스님 이후로 황금기를 맞은 선종은 오종 칠파로 나뉜다. 오종 가운데 조동종의 동산 양개화상의 행각이 기억 남는다. 화상이 출가한 뒤 모친과 주고 받은 편지는 전문강원 사미과 치문경훈에 실려 있다. 다음은 그 편지의 일부이다.

양개는 부모님의 뜻을 달게 받들지 못하고 집을 떠난 뒤로 지팡이를 짚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세월이 벌써 10년이나 바뀌고 갈림길은 어느새 만리나 막혔습니다. 바라옵건대 어머님은 마음을 거두어 도를 생각하고 뜻을 거두어 공(空)으로 돌아가, 이별한 정을 생각하지 마시고 문에 기대어 행여나 돌아오는가 하고 바라보는 일일랑 하지 마소서. (후략)

그런데 회장의 모친은 양개를 그리워하다가 울고는, 또 문에 기대어 행여나 오지 않을까 하고 이마에 손을 얹고 기다리고 또 울고 하다가 급기야는 설명을 하고 말았다.
양개는 단표 노상에 행걸일승이 되어 행운유수로 구름처럼 물처럼 흘러 다니다가 우연히 고향 땅을 지나치게 되었다. 비가 와서 땅이 질척한데 어떤 눈먼 여인이 잘못하여 신발을 개울에 빠뜨렸다. 양개가 신발을 건져서 여인의 발에 신겨 드렸는데 천만 뜻밖에도 눈먼 여인은 당신의 모친이 아닌가 양개가 하도 보고 싶고 그리워서 울고 또 울고 하다가 설명을 한 것이다. 양개의 가슴은 어떠하였을까. 그러나 ‘어머님 접니다’ 소리를 하지 않은 채 행운유수의 길을 담담히 떠나가 버렸다. 차마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수행도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옳은 일일까. 그러나 양개는 그냥 떠나갔다.
세월이 흘러서 양개화장은 한 회상의 종주가 되어 문하에 천여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루는 시자가 와서 산문 밖에 어떤 노파가 지쳐서 쓰러져 있다고 말하기에 알아보니, 화상의 모친이 거기까지 와서 지쳐서 쓰러진 것이었다. 행장을 수습하여 보냐 수중에는 좁쌀 몇 홉과 동전 몇 잎이 남아 있었다. 혈육의 정과 인연은 그렇게 끈끈하고도 깊은 것이었다. 화상은 모친의 영가를 정성껏 천도하여 주었다. 그러면 그렇게 모질고 굳세게 수행한 결실의 법력은 어떠한 경지인가 하루는 공양주가 쌀을 씻다가 잘못하여 많이 엎질렀다. 그것을 보자 회장이 화를 내면서 “상주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이렇게 함부로 흘리느냐 ! ”하며 엄하게 꾸중하고 있는데 흘연히 도량신이 나타나서 “조실스님이 오신다는 말만 듣고 30년이 지나도록 뵙지 못하였는데 화를 내고 계시는 겨를에 이제사 뵙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귀신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즉 화상은 그 숱한 세월을 법회선열 속에서 별다른 잡념 없이 보낸 것이다.
당의 함통 10년 3월 초하룻날 문인들을 시켜 머리를 깎고 옷을 갈아 입고 종을 치게 한 뒤 엄연히 앉아 업적(入寂)하였다. 대중들이 통곡을 하고 슬피 울다가 해가 기우니 회장이 홀연히 눈을 뜨고 대중에게 말하였다. “대개 출가한 사문이란 마음이 모든 물질을 의지하지 않아야 참으로 수행이 되었다 하겠다. 살면 고달프고 죽으면 쉬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그리 슬퍼들 하는가’ 하고는 일 보는 중을 불러 우치제(愚癡齊)를 한바탕 지내니 대체로 재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제였다. 대중이 여전히 사모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7일을 더 있다가 공양 때가 되매 화상도 대증을 따라 공양을 마치고는 말했다. “중의 집에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대체로 떠날 때가 되면 이처럼 수선을 떨게 된다” 하고는 제 8일째 되는 날 목욕을 마치고 단정히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는 63세 법랍은 42세, 시호는 오본(橋本)대사요 탑호는 혜각(慧覺)이었다.
양개화상이 행각하고 다닐 때 일이었다. 밀사백(密師伯)과 함께 다녔는데 계곡에서 채소 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화상이 말하기를 “깊은 산이라 사람이 살지 않을 텐데 어째서 채소 잎이 떠내려올까. 혹시 도인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는 둘이 의논을 한 뒤 풀을 헤치며 계곡을 따라서 5~7려쯤 올라가니 훌연히 깡마르고 야릇한 모습을 한 사람이 보이니 곧 용산(龍山 혹은 隱山)효냉이었다.
화장이 행리를 풀어놓고 앉자 용산이 물었다.
“이 산에는 길이 없는데 스님들은 어디로 해서 왔는가”
양개가 답하기를 “길이 없는 것은 놔두고 화상은 어디로 들어왔습니까.”
“나는 구름과 물을 쫓아오지 않았다.”
“화상께서는 이 산에 사는 지 얼마나 되었소·”
“봄과 가을에 관계치 않는다.”
“화상이 먼저 머물기 시작했나요-산이 먼저 머물렀나요”
“모르겠다.”
“어째서 모르겠습니까.”
“나는 사람이나 하늘에서 오지 않았다..,
“회장께서는 무슨 도리를 얻었기에 이 산에 머무시는가요”
‘꽤가 보니 두 마리 진흙소가 싸우며 바다로 들어간 뒤로는 지금까지 소식이 없노라.”
양개확상이 비로소 위의를 갖추고 예배를 한 뒤 물었다.
“어떤 것이 주관 가운데 객관입니까.”
“푸른 산에 흰구름이 덮혔다.”
“어떤 것이 주관 가운데 주관입니까.”
“오랜 세월을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주관과 객관의 차이점은 어떻습니까.”
“긴 강물 위에 파량이 인다.”
“주관과 객관이 서로 보며 무슨 말을 합니까.”
“맑은 바람 불어오니 달빛이 희도다”
보살만행이란 자기가 사람이구나 하는 성찰로부터 시작인 것이다. 운수납자의 행각이란 자기의 주변이 보이기 시작할 때 좋은 시절인 것이다. 옛 사람도 발밑을 비추어 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