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불교, 생활불교로서의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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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무비 / 범어사 강주
1991년 04월 110호
만행(萬行)의 본래 의미가 상실되어가고 있는 요즈음, 만행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새겨봄으로써 오늘의 현실에 그 참 뜻을 되살려 실천하는 일은 참으로 의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만행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일만 가지를 행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온갖 수행을 가리켜는 말이며, 구체적으로는 육도만행(六度萬行), 즉 ‘육바라밀(六彼羅寶)을 닦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엄밀히 말하면 수행 그 자체가 만행이다. 그런데 우리가 특별히 만행을 강조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선원에서 선정(輝定) 중심의 수행만 닦다 보니 거기에서 생겨나는 혜단을 줄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행을 함께 겸해서 한다는 뜻에서 만행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수행을 닦는 것은 복덕(福德)과 지혜를 비롯하여 다른 모든 덕목을 골고루 갖춘 부처님과 같은 완전한 인격자가 되기 위함이 그 목적이다. 선정만 닦고 계행이 없는 치우친 수행이나 남을 위한 보시행, 즉 사섭법(四椰法)-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 ·동사-의 이타행(利他行)에 의한 실천이 없이는 완전한 수행여 될 수 없다. 완전한 수행 이 못되면 결국 완전한 인격자가 될 수도 없다.
이러한 이론적 바탕이 근거가 되어 결제기간 동안 선정을 닦은 후에 해제가 되면 여러 가지 수행을 경험하기 위해 만행 길에 오르는 것이 하나의 원칙처럼 된 것이다. 실지로는 만행의 주된 내용이란 따로 있을 수 없으며, 다양한 수행을 닦는다는 게 본래 목적이다. 이러한 본래 목적 안에 행해지는 만행의 주된 내용은 절망을 지고 다니면서 보시를 할 수 있으면 보시를 하고, 육체적인 힘이 필요한 곳에는 힘으로 도와 주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어떤 경우든 마다하지 않고 도와주는, 이른바 헌신과 봉사와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다. 중생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부족한 수행이지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X} 하고, 치유하고자 하
는 미음을 갖는 것아 만행의 근본정신이다.
사실은 선원에서 가장 바람직한 수행을 한다고 자부하며 자타가 공인하는 선원의 수행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만행이다. 선원에서 선정을 익히는 그 자체는 어떻게 보면 편중되고 치우친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화로운 수행을 위해서는 만행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본래 부처님 당시의 수행은 우기 때, 다시 말해서 결제기간 동안만 선정 중심의 수행을 닦고 나머지 기간에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수행을 닦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렇게 행해지던 수행방법이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선정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특히 달마대사가 선사상을 제창하면서 ‘관심일법이 총섭제행(總鐵諸行)’이라는, 즉 마음을 관(觀)하는 한 가지 법이 모든 수행을 포섭하고 있다는 사상이 선정 일변도로 가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선정 제일주의는 육바라밀을 닦는 수행을 게을리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선정 중심의 수행은 여러 가지 혜단을 가져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선정만 채일이라는 생각에서 탈피하여 만행을 골고루 닦아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선정만 닦으면 된다는 사장은 완전환 인격체로 향상하는 데 있어서 부족한 점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만행의 중요성을 깨달아 해제가 되면 으레 유행처럼 만행을 나서게 된 것이다.
초기에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거나, 보시행을 하거나, 이타행을 하면서 선정에서 갖추지 못한 여러 가지 수행들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만행을 한다고 하면서 행각(行關) 중심이 되어버리고 마는 경향이 생겨나게 되었다. 만행이 주로 해제철에만 행해지던 관례 때문에 만행이라고 하면 으레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게 된 것이다. 만행이라고 하면 여행을 생각하게 되고’ 여행이라고 하면 또한 만행을 떠올리는 것으로 그 의미가 잘못 전해져 온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선정 중심의 수행에서 생긴 폐단을 줄이고자 만행을 골고루 닦는다고 하면서 만행의 또 다른 폐단을 낳게 한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만행에 대한 또 다른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만행의 근본 뜻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만행의 참 뜻이 완전한 인격체의 완성을 위한 수행에 있음을 생각할 때 어느 한 곳에 치우치자 않고 육바라밀을 골고루 닦아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대승불교에 있어서 흔히 보살은 최고의 인격체로 표현된다. 보살로서의 인격을 갖추는 데 있어서는 결코 치우친 수행을 해서는 안 된다. 만행의 본래 의미를 잘 이해한다면 불교가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피와 살이 되는 생활불교가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인간 중심의 인간불교가 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합하여 안간생활불교라고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육도만행을 치우침 없이 완벽하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인간생활을 위한 불교이며, 우리가 목적하는 훌륭한 인격자가 그 가운데에서 갖춰질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특정인에게만 부여된 과제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실천해야 할 궁극의 목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수행의 덕목을 제대로 닦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불교인이며 수행자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지향하는 실제 생활에 뿌리를 내린 불교이며, 인간 중심의 불교이다. 이러한 바람직한 생활은 곧 이상적인 보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결국 육바라밀로 표현되는 만행을 올바로 닦아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만행의 구체적인 내용이 되는 육바라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육바라밀의 첫째는 ‘보시(布施)’이다. 보시는 흔히 ‘베푼다’는 말로써 표현된다. 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아니면 육체적인 힘이든 친절한 말이든 자기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베푸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지계(持械)’이다. 지계라고 하는 것은 좁은 의미로는 계율을 지킨다는 말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도덕과 윤리와 질서, 사회의 법규나 규칙을 잘 지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단순히 질서를 지키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솔선수범해서 그것을 지킬 뿐만 아니라 앞서서 선도하는 그런 생활이 바로 지계의 생활이다.
셋째는 ‘인욕(忍屬)’이다. 인욕이라고 하는 것은 ‘욕됨을 참는다’고 풀이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참는 것을 넘어서서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피해를 입히는 사람에게도 용서와 아량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감싸주고 어루만져주는 이해와 관용으로 대하는 생활이 인욕의 생활이다.
앞의 보시 ·지계 ·인욕의 세 가지 수행이 육바라밀의 중심 되는 덕목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수행생활을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나 특별한 시기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쉬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육바라밀의 네번째 항목에 해당하는 ‘정진(精進)’이다. 정진은 바로 앞의 세 가지 수행이 잘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다음으로 정진이 쉼 없이 계속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선정(輝定)’이다.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안정된 생활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좀더 깊은 의미로는 정신적인 아주 높은 차원의 삼매를 뜻한다. 앞의 보시 ·지계 ·인욕의 생활이 정진으로 합쳐져 그러한 생활야 몸에 배고 자연스럽게 되어, 그것이 하나의 전 생활로 굳어진 상태가 되었을 때 바로 선정은 이루어진다. 선정이란 일부러 마음을 내지 않더라도 어디를 가나 보시 ·지계 ·인욕을 실천할 수 있고, 이미 생활화되고 습관화되어 자연스럽게 정진이 이루어지는 생활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선정에 든 삶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수행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게 된다. 그것이 곧 생활불교적인 약미의 선정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육바라밀의 마지막 덕목인 최상의 ‘지혜’가 거기서 창출되는 것이다. 지혜란 바로 삶의 슬기이다. 생활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인격자로서 완성된 모습이 지혜인 것이다. 일상적인 삶을 떠나서는 달리 다른 어떤 지혜가 나올 수 없다.
진정한 지혜란 바로 육바라밀의 수행을 골고루 행하는 가운데서 나와야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혜가 될 수 있다. 또 그러한 지혜로써 많은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면 그야말로 이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로 전환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국토 건설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원각경」에서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청정하면 만 사람이 청정하고, 만 사람이 청정하면 이 국토의 모든 사람이 다 청정하고 그래서 모든 인류가 다 함께 청정하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육바라밀의 수행을 생활화한다면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건설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하나의 불씨로 수많은 촛불에 불을 밝히듯 누구나가 육바라밀로 수행되는 만행을 실천한다면 바람직한 불국토 건설이 가능할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만행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특정한 수행인에게만 해당되는 그러한 만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실천해야할, 그것도 치우친 덕목을 닦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필요하고 이 사회를 밝히기 위한 모든 덕목을 하나도 빠짐없이 골고루 실천함으로 해서 불교가 이상으로 하는 정토 건설, 불국토 건설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사회가 하루 빨리 전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만행의 진정한 뜻을 오늘에 되살려 현실 생활에서 실천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