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소참불면(花笑漸佛面)!
법당앞 마당에 꽃이 피니 부처님 얼굴도 부끄럽더라. 겨울을 지키는 마지막 전사 꽃샘추위도 화사한 꽃망울을 예비하는 봄 바람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대지는 새싹과 4월의 꽃들로 장엄한 화장찰해를 이루고 있다. 언 황토 위 햇빛 침묵을 밀어내고 솟아오르는 뭇생명의 개화로 시작하는 봄은 넘치는 새로움 그것이다.
이 봄의 새로움은 또한 겨울이 주는 죽임과 어둠의 구태를 기어코 이겨냈을 때 가능한 것이며, 이 이검은 생명의 지순한 인고와 기다림 속에서 끊임없이 안으로 생명의 부화를 꿈꾸어 온 결과이리라.
이 새로움 앞에는 겨울이 남긴 껍질인 북서풍의 매서움도, 동토의 잔설도 뼈 속을 스미는 추위도 한갖 지나가는 바람이다. 그래서 흙 냄새 향기로운 봄은 희망이요, 생명의 환희요, 새로움의 시작이다. 이처럼 화사한 봄은, 피어나는 꽃 같은 생명의 개화는 어쩌면 부처도 신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아닌가.
대지 위의 봄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생명의 환희로 기득하지만 우리들 인간의 틈은 아직 봄을 예감하기엔 겨울의 음습한 구태가 아직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걸프 전쟁이 힘을 앞세운 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끝나고, 부패한 관료와 악덕기업주의 욕망추구가 빚은 수서사건 ·악동강물 오염사건 풍어 우리들 가슴에 분노를 일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기업인의 사회적 윤리와 정치인의 정치적 책임을 책망하지만, 문제는 모든 것이 금전으로 환치되는 자본주의 제도 아래서 이러한 병증이 윤리와 사회적 책임만으로 치유가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위정자는 일시적으로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사건 책임 담당자 몇 사람을 형사처리하고서 이러한 병폐를 제거했다고 자임하겠지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인 무한대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의 굴레 아래서는 이러한 병증이 또 다른 형태로 전화되어 나타날 것이 틀림없다. 우리 종단 내부에는 지난 가을부터 종단의 최고 수장인 종정추대 문제를 놓고 심한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무슨 단체이든 어떠한 조직이든 그 자리의 최고 책임자를 선출해 내는 문체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 선출이 어려운 산고를 겪고 이루어질 때 단체나 조직이 좀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가는 데 도움을 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일에 과정이 정당하고 올바르게 진행됐을 때 결과도 좋은 방향으로 기대해 봄직한데 종정추대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종단 현실은 우려를 넘어서 우리 종단이 한계적 상황에 도달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종정이란 위치는 한국불교의 정맥을 잇는 상정적 존재이자 정법의 바른 잣대를 여실히 재연해 내는 지고의 자리이며, 전 종도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최고의 존경과 권위의 대상이다. 이처럼 종정의 위치가 지중할진대 그 소임을 맡는 스님은 그 위치에 걸맞게 높고 당당한 법 다음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수행과 교화에 남다른 깊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종정추대 또한 전 종도가 납득할 만한 공명정대한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바 지금까지 종정추대는 원로회의의 고유권한으로서 종단의 원로스님들의 중지와 합의를 통해서 별반 무리없이 추대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차기 종정추대에 종회가 개입하면서 갖가지 무리를 야기시키고 새로운 갈등과 불화를 노정시키고 양식 있는 종도의 염려와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과 불화의 원인은 실재하지도 않고 정당한 방법일 수도 없는 문중과 문중의 대결을 조장하면서 그 이변에 막대환 자금을 동원하고 있는 데 있다. 이렇듯 법 다움에 의하지 않고 문중과 금권에 의해 파행적으로 종정이 추대된다면 종정의 권위는 허울에 불과할 것이며, 종도의 불신과 외면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종정추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문중과 문중의 대결과 막대한 금권의 동원이라는 두 가지 측면은 우리 종단이 아직도 봉건제적 유습인 문중의식과 금전만능의 자본주의적 병폐에 깊게 침윤되어 있음을 나타내준다. 비단 이러한 봉건제적 문중의식과 금전동원은 종정대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종단 내에 물의를 일으키고 세인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 왔던 절 뺏기 싸움, 종권 다툼이 문중 이익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진행되어 온 것이 사실이며, 이러한 이익 추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이렇듯 문제는 이 제도적 모순이 공히 집단 이기와 개인이기를 추구하는 데 있으며, 그것의 실현을 위해 폭력 동원을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고, 종단의 질서를 좌우하는 더 큰 힘인 권력을 등에 업기 위한 충성경재에 매달리며 필연적으로 폭력동원과 관권동원이 그 결과를 보장해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악화가 약화를 구축하고, 진승은 시정에 내려가고 가승은 절에 남는다는 자조적 말들이 우리들 현실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설사 종단지도부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어 화합되고 법다운 종정추대를 이루어낸다 하더라도 봉건제적 문중의식과 금권만능의 제도적 병폐를 일소해 내지 못 한면 종단이 구심점을 일고 표류하는 것을 막아내는 못할 것이다.
병을 치료하는데는 두 가지 요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그 병의 환부를 직접 치료하는 대중 요법이고 다른 하나는 병이 자라는 조건과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건강한 체질로 개선해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갖가지 병중이나 종단의 이권대결도 근본적으로 사회의 구조와 제도적 장치를 바꾸어내지 않고 한 인간의 건전한 양심이나 도덕성에 의지한다면 기대하기 어려운 희망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는 인간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스스로 이루어가는 메커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구조와 제도의 잘못된 점을 살피고 개선해 내지 못하면 도리어 인간이 제도의 메커니즘에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정추대 문제에서 야기되는 불화와 반목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제도를 개혁해 내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겐 유구한 전통 속에 축적되어진 모범적 대안들이 무수히 있다. 산중공동체의 민주적 질서와 무소유의 소유원칙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들 스스로가 무사안일과 개인적 이기에사 벗어나 진보에의 열정에 긴장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장기간 종정 궐위 사태는 우리 청년 승가에서 종단 현실에 좀더 적극적인 발언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전국 선원의 수좌스님도, 승가대학의 학인스님도 넘 조용하기만 하다.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종정추대 문제가 남의 일도 아니잖는가. 지금과 같은 종정추대 문제가 음모적으로 계속된다면 문제해결도 더욱 미궁에 빠질 것이고, 설사 어떤 모양새를 갖추어 무난한 추대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우리가 인식하고 진단한 문제의 토대는 그대로 남아 있을 진대 근본적 제도개혁을 위한 우리의 대안들이 모아져야 한다.
죽임과 침묵의 겨울의 잔설도 봄바람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우리들 온갖 병폐와 구조적 모순도 모범적 대안을 가진 진보적 열정 앞에 구태를 벗어 던지고 역사의 장 속에 갈무리되도록 해야 한다.
선문에 자주 쓰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사자와 개에게 흙덩이를 던지자 영리한 흙을 던진 사람을 물고, 한나라 개는 그 흙덩이를 물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