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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불교와 요새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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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혜묵 1991년 04월 110호
언젠가 오래도록 산사에서 살면서 참선공부만 해오신 구참 수좌스님과 소위 운동권이라고 지칭되는 청년불자 한 분이 산중불교니 민중불교니 해가면서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의 논쟁 속에 등장하는 주장이나, 이론 ·방법들은 가히 동서와 고금을 종횡무진하는 대단한 것이어서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어도, 귀에 들어오는 내용은 늘 들어오던 다음과 같은 줄거리 같았다.
즉 청년불자는 오늘날의 불교계가 시대에 뒤떨어져 서 케케묵은 과거에만 집착함으로써 민중과 역사의 현실적인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는, 따라서 부처님께 서 중생들의 고통에서 시작하셨듯이 응당 요새 불교도 현실의 고통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수좌스님은 현실의 고통이야 언제는 없었으며, 불교야말로 그 고통을 해결해 주는 진정한 가르침일진대 부처님께서 하셨던 것과 같은 출세간적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하여야, 그리고 는 그 깨달음과 이를 기초한 지혜 ·방편으로 세간을 교화하여야 해결될 수 있는 것이지 도대체 민중불교 가 언제의 불교며, 세간적 욕구와 방법에 의해 조립된 주장들을 어떻게 불교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두 가지 상반되는 주장은 예컨대 불교를 사회적인 대중운동의 국면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시대상황의 실천에 대한 요청과, 불교계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는 승가집단의 수행정진, 깨달음의 체험이 라는 현실적으로 상충하고 있는 두 입장을 잘 요약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논쟁이 담고 있는 내용의 화사함이나, 그러한 논쟁의 연륜만큼이나 각양각색의 주장·입장을 다 말할 수야 없겠지만, 그 진지했던 논쟁 속에 자주 등장하는 옛날 불교, 요새 불교라는 대구를 듣고 있자니 불교와 역사를 둘러싸고 벌어져 왔던 수수깨끼들이 떠올랐다.
경전을 읽다 보면 싯다르타 태자의 탄생을 맞아 여러 천인들이 기뻐하였다는 구절들을 보게 된다. 깨달음을 성취하실 이와 동시대에 태어나 가르침의 인연 올 직접 맛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후대 스님들의 글들에서는 종종 부처님께서 떠나가신 지 오래되었음 을 탄식하는 구절들도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교화를 몸으로 받지 못하고 혼탁한 시대를 살며 힘들게 수행 해야 하는 말세 중생의 처지를 슬퍼하는 것이다. 이런 분들의 생각에서 보면 불교는 이제 언제나 옛날 것일 수밖에 없다. 진짜 불교는 옛날 어느 시절에 실존했던 진짜 부처님과 함께 사라져 버렸고 기껏해야 그 그림자가 언어문자를 통해 경전에 투영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요새의 중생들은 요새의 고통을 옛 날의 가르침에 비추어 반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실제로 이런 생각은 가르침을 해석하는 하나의 사 관을 형성해 왔는데 부처님께서도 직접 설하셨듯 정법 ·상법 ·말법류의 역사관이 그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설해지는 시점을 시작으로 시간이 갈수록 그 가르침의 효력은 사라져, 말법시대의 중생들은 그 교 화의 덕을 입지 못하고 고통에 허덕이며 새로운 부처님이 오셔서 새롭게 가르침을 펴주시길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관은 미래불에 대한 희구와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가르침, 옛날, 요 새, 그리고 미래가 순환하는 사관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법등명(法登明), 자등명(自置明)을 유시로 삼으신 불조(佛祖)를 모시고 불자들이 어찌 저와 같은 타력적인 사관에만 매달려 새로운 부처님이 저절로 오시길 일방적으로 기다리고만 있었겠는가.
“법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심이다. 이 마음은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포섭한다. 이 마음에 의지하여 마하연의 뜻을 현시한다.” 이것은 「대승기신론」의 첫 구절이다. 이 명제야말로 대승이라고 알려진 봉건교 학의 영원한 테제요, 불교를 불교이게끔 보장해 주는 완결된 판결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대승교학이 이 구 절, 또는 이와 유사한 기초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흔해 빠진,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에도 물론 있고, 미래에도 있을 중생들의 마음에 의지 하여 대승의 교의를 보장할 수 있다니. 시공을 초월하여 누구나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불성, 그것만 현실에 발현해 낼 수 있다면 부처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옛날이 되었다고 한탄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이야말로 공기를 가지고 다이아몬드를 자유자재로 지어내는 일일테니(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이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는 항상 요새 것일 수 밖에 없다. 불교가 항상 중생의 마음을 기초로 하고 있으니 옛날 불교도 요새 것이요, 요새 불교도 요새 것, 미래 불교조차 요새 것인 것이다.
그러데 이러한 한 구절의 해석을 놓고서도 분분한 싸움이 있어 왔으니, 예를 들어 중생들의 마음을 기초로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중생이 밥을 생각하면 밥을 기초로 하고, 색을 생각한다면 색을 기초로 하고, 사랑을 하면 사랑을, 혐오하면 혐오를 기초로 해야 할 것이니 도대체 어느 것이 진짜 중생심이며 어는 것이 진자 대승불교의 시작일 수 있단 말인가. 깨닫지 못한 것을 중생이라 하고 한 생각 돌이키면 부처라 한다더니 중심생을 중심생일 수 있게 해주는 진짜 중생심의 본체, 진짜 불성, 진자 깨달음, 진짜 불교를 놓고 벌어져 온 저 지긋지긋한 논쟁들을 어떻게 다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논쟁들 자체가 부처님과 시공을 두고 멀리 떨어져 요새 중생심, 요새 깨달음을 신뢰하고 확인할 길 없어 옛날의 진짜 부처님을 사모하는 내 마음 모르는 중생심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부처님께서 우리들의 삶과, 직접적인 고통과 관계가 적은 논쟁들을 희론이라고 불렀듯이 대승교학 또 한 각종의 희론에 대한 기가 막힌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바로 옛날 것이 요새 것이요 요새 것이 아니며, 요새 것이 옛날 것이요 옛날 것이 아니라는 투의 논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불멸의 결정판과도 같은 마법의 논리들을 파고 들어 가보면 결국엔 「기신론」의 명제 같은 만고불변의 불성, 각성 따위의 본성과 만나게 될 뿐이다. 요새는 안통 하는 진짜로 옛날 것인.
요새 한국불교는 조계종을 간판으로 걸고 있다. 조계종은 선종이다. 우리의 요새 불교가 정통으로 종취하는 불교는 저와 같은 대승교학의 명제들을 극단으로 실천하는 일로향상의 최상승 선종인 것이다. 누구나의 마음에 옛날이고 요새이고 할 것 없이, 간직 되어 있을 한 물건, 주인공의 발현을 일구월심 종취하는 그런데도 요새 사람들은 저와 같은 불교를 옛날 것이라고 투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일로향상의 최상승 선종은 요새에는 최상승 가르침과 전혀 무관한(아니지도 않은)것에 의존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조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 모르면 몰라도, 요새 몰라도 알 것 같고, 알아도 모를 것 같은 깨달음의 향상종만을 믿고 따르며 무주상 보시복덕을 지을 대승 단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렇게 경제적인 측면만 보더라도 대다수의 사찰은 참선보다는 제사, 염불에서 떨어지는 잿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조그만 스님들이 사시는 조그만 절은 그렇다 치고, 대규모 선원을 만들어 큰 스님과 많은 수좌들이 모여 수행하는 총림조차 국립공원의 관광수입이나 본 말사에서 거둬지는 불전으로 유지되는 것이 현실이다. 수좌들이 지향하는 가르침을 나눠 가짐으로써 단월들의 공양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내려오는 옛날 집에 옛날식 옷을 입고 살면서, 옛날대로 마음에 없는 복전을 운위하며, 옛날 책을 보고 옛날 염불을 해주는 대가로 요새 절들은 살고 있다. 요새 수좌들은 게다가 옛날 것도 요새 것이고 요새 것도 요새 것이라는 신념 아래, 한 소식에 천년 빛을 갚겠다는 원대한 포부 아래 염불로 연명하는 부전나부랭이들을 하시하며 수행에 매진하고 계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사건건이 말려들다 보면 정말로 요새가 옛날 같고, 옛날이 요새 같고, 또 아닌 것도 같고, 이렇게 되기 마련이다.. 옛날, 요새의 끝이 없었고, 저 수좌스님과 청년불자가 했던 류의 논쟁도 듣게 된 지가 짧은 세월이 아닌데 아직도 돌파구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네편, 내편으로 갈려 싸움만 더욱 치열해 지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옛날 것은 옛날 것이고 요새 것은 요새 것이어서 명명백백, 뻔한 것 같은데도 지리하니 희론만 더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봉건교학의 교묘한 함정에 빠져 앞으로 가도 뒤로 가는 줄을 모르고 서성이는 때문인 것 같다. 어차피 부처님이 안 계신 지금, 종정조차 돈으로 사고 팔려 한다는 세속의 비난조차 들어야 하는 요즘 불교에 저와 같은 예날 것, 요새 것 같은 진지한 논쟁은 참으로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논쟁이 아닌가 한다. 요새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래도 요새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말은 말이고, 글은 글인 바에야 그 말을 해야 하고 그 글을 써야 했던 그 당시의 상황, 의도, 느낌들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재현하거나, 표현 전달해 줄 수는 없는 법이다. 가령 우리도 이 글을 옛날식대로 멋있게 마무리 지을 수 있다.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도 불가득인데, 옛날 요새, 요새 옛날 어데가 어딘고 돌(?)!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어떤 망상이 어떻게 비져나와 그 숱한 마무리들을 왜 그렇게 지어댔는지 필설로야 어떻게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멋을 부리거나 권위를 차려 옛날 글, 요즘 말들을 횡으로 종으로 엮어봐야 말은 말에 걸리고, 글은 글에 걸리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