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불교 운문종 종찰인 운문사 방장 운문 불원雲門佛源 화상을 만난 것은 1996년 3월 24일 오전이었다. 꽃은 비가 내리고 산야가 안개로 뿌옇게 뒤덮인 으시시한 봄날이었다.
운문사는 격렬하고 험준한 가풍으로 유명한 운문종 개산조 운문 문연선사(864-949)의 행화 도량이다. 나는 평소의 막연한 생각이지만 대한불교 조계종의 전 종정인 성철스님(1911-1993)의 선풍禪風이 운문 가풍과 닮은 데가 있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래서 운문사 방장이며 운문종 종정인 불원 화상을 만나는 데 남다른 기대와 설레임을 가졌다.
먼저 결과부터 말한다면 기대 이상의 감화를 받았다. 불원 화상은 현대 중국 불교 중흥홍조이며 선문 종장宗匠인 허운虛雲 화상(1840-1959)의 법사로 오늘의 중국 불교를 대표하는 대덕 반열에 올라 있는 큰 스님이다. 만나고 보니 그는 한국 선종(조계종)의 법원法源인 저 유명한 남종선 조정祖庭 조계曹溪 남화선사-옛 이름 보림사-의 방장을 겸임하고 있기도 했다.
산문을 들어서서 차를 절 마당에 세우고 객당客堂으로 들어갔다. 방장은 절담 밖의 채소밭과 대나무 숲을 돌아보는 중이란다. 객당에 앉아 기다리기가 덤덤해 밖으로 나왔다. 봄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마침 불원 방장이 우산도 없이 비를 촉촉이 맞은 채 들어왔다. 문간에서 수인사를 한 뒤에 곧장 방장실로 함께 올라갔다. 방장실은 선승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머리 조각의 주장자와 석장錫校·불자拂子가 가지런히 벽에 세워져 있는 엄숙한 분위기다. 그러나 객을 맞는 화상의 위의威儀는 권위의식 같은 건 눈꼽만큼도 없는 자장하고 푸근한 시골 할아버지의 온화함이 흘러 넘쳤다. 고향을 찾았을 때와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화상이 권하는 녹차는 따스하기만 했다. 불원 화상의 체구는 6척 장신에 눈이 크고 골격이 뚜렷해 위압감 같은 결느낄 만했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화상은 한국을 한번 다녀왔다며 한국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리하여 초면의 서먹함이 사라지자 곧장 운문 선사의 화두 ‘간시궐乾屎橛’과 ‘운문 삼구雲門三句’ 등에 대한 선문답을 거량했다. 불원 화상의 진면목은 재당齎堂에서 점심 공양을 함께 할 때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방장의 지시를 받은 강주 스님의 안내로 경내를 돌아보는 가운데에 “한국손님 점심 공양하라”는 방송이 나와 재당으로 갔다. 불원 방장은 이미 홍콩에서 온 신도들과 함께 식사중이었다. 우리 일행이 자리를 잡자 그는 밥그릇과 수저를 들고 우리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 왔다.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밥그릇 위에 일일이 놓아 주면서 입맛에 맞느냐고 자상하게 우리를 챙겼다. 옷 입고 밥 먹으며 대소변 보는 ‘착의끽반着衣喫飯 아시송뇨屙屎送尿’의 일상이 지극한 불법의 현현이며 도道의 실천이라는 선가의 평상심이 피부에 와 닿았다.
누런 세수 수건을 가슴에 대고 공양하던 불원 방장이 무심히 한마디를 던진다. “신경통이 있어서 식사 때 밥을 좀 흘린다”고.
인간은 대체로 자신의 결점을 숨긴다. 그러나 그는 적나라한 자신의 실존을 고백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화상이 신경통이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데…. 밥을 거의 흘리지도 않았고 식사 때 수건으로 앞을 가리는 관습도 전혀 낯선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어록에서 읽은 약산 유엄 선사(751-834)의 한마디가 밥그릇을 스쳐간다.
“나는 절름절름, 비틀비틀 백천 가지 추태를 가졌는데 그런 대로 그럭저럭 세월을 보낸다.”
약산은 학인 백암에게서 “화상의 높으신 뜻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이처럼 자신의 실존을 마치 조개가 입을 벌려 속을 훤히 드러내듯이 내 보였다.
불원 방장 역시 이러했다. 외국에서 온 초면의 객한테 굳이 자신의 신체적 결함까지를 스스럼없이 고백하는 것도 달인의 경지에 이른 선 수행이라면 지나친 억지일까.
나는 점심 공양 중에 나눈 불원 방장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낙엽 지어 벌거벗은 나무에 불어 온 금빛 가을 바람(體露金風)’이 뼛속까지 시원하게 해 주는 기분을 느꼈다. 낙엽(번뇌망상)이 떨어져 나간 ‘알몸의 나무(眞如法身)’는 우주령 (Universal mind)으로 온 세상을 포용한다. 다리가 부러졌으면 부러진 대로, 팔이 잘려 나갔으면 잘려 나간 대로 자신 있게 온몸을 드러내 보여 주고 바람을 맞는다. 이 때 한 티끌의 번뇌 망상도 없는 알몸에 와 닿는 바람이 어찌 금빛 바람이 아니겠는가.
다음날 조계 남화 선사에게 구면으로 다시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역시 점심 공양까지 함께 했던 불원 화상은 내가 석달동안 중국 열한 개 성, 여든 여섯 개 선종 고찰을 답사하면서 만났던 여러 고승 가운데에 한 분이었다. 이틀 동안 만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적지 않은 감화도 받았다. 오래 기억해 두고 싶은 동아시아 선승 가운데 한 분이다. 속성이 막莫씨로 호남성 익양 출신인 불원 화상은 열일곱 살에 출가히야 남악 형산 복엄사-남악 회양 선사 행화 도량-에서 비구계를 받고 인근 남대사-석두 희천 선사의 주석 도량-강원을 나왔다. 그 뒤에 운문사 지객知客, 항주 정자사 주지 등을 지낸 뒤에 1953년에 운문사 방장이 되었다.
1958년에는 시장 비판을 받고 조계 남화사로 가서 노동을 하던 가운데 문화 혁명을 맞이해서는 ‘6조 혜능 진신상’을 뒷산에 묻어 파괴를 면하게 한 공덕을 남기기도 했다. 1982년부터 다시 운문사 방장으로 부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디 불원 화상의 법체에 체로금풍의 가을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