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선사 이후 스님들의 행장(行狀)이 제대로 정리된 것이 거의 없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전반의 피폐와 불교 내부의 혼란과 쇄미, 일제(日帝)의 식민지 침탈 둥 불교내부의 요인(要因)과 사회전반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질곡이 겹쳐 있었던 것
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제까지 외형적으로 해인사가 그 규모 정도의 가람을 이루고 존속하여 왔다는 점을 생각할 때 거기에서 몸 담았고 영적(顧) ·육체적 활동을 전개했던 선사들의 역사적 기술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 그 시간을 뒤 돌아 볼 때 아무것도 없는 거기에서 받는 인상이란 무소유로 살아온 스님들의 철저 한 자기 방기(放棄)의 초월적 세계를 느끼기 이전에, 무문화적(無文ft的) ·무역사성(無歷史性) 등으로 상정되는 정신적 공허를 더 느끼고 당혹해 할 수밖에 없음은 비단 해인사뿐 아니라 전(全) 사원이 가진 역사인식의 현실이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에게는 불행하게도 서양과 같은 근대라는 역사적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근대불교사 또한 시간적 공간을 노정한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편의상 국호를 대한(大尊)으로 고친광무 원년인 서기 1897년부터 경술 망국(亡國)에 이르기까지의 대한제국시대와 다음에 일제 침략시대를 지 나서 조국광복까지의 기간인 약 50년을 근대불교시대로 삼기로 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대부분의 사찰이 그랬지만 일제 의 수탈에 대한 순명(願命)과 항거, 시대적 ·사회적변천에 따른 극심한 변화에 휘둘리던 시기였었다.
이 시기에 해인사에 출가를 했거나 주석했거나 머물렀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우선 얼핏 우리들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인물로 친일파의 거두 이회광(李會光)을 비롯하여 우송(友松)스님. 석두(石頭)화상·제산스님 ·퇴운스님 ·남전스님 ·백용성스님 ·엄환경(林幻鏡)스님, 최범술 등이 최근세에 해인사에 머물렀던 인물들이다.
그 가운데에서 정확한 기록과 행장이 남은 분은 사 실 한 분도 없다. 단편적으로 편린이 남아 있는 것을 겨우 추적하여 그 법손들이 정리한 것이 있다면 최근에 백용생스님에 대한 것들과 석두스님에 대한 비문(牌文), 남전스님의 간략한 문집들을 본 적이 있지만 그 밖에 스님들은 불과 몇 십 자의 비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아 직도 진행중에 있는 분도 있지만 까마득히 잊혀진 분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이미 용성스님에 관한 행장은 본 「해인」지에 작년1년간 보광스님께서 연재했으므로 생를 추하기로 하고, 여기에서 제산스님과 퇴운스님의 행장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1) 제산 정원(霽山淨圓)선사
제산스님의 휘(譯)는 정원, 제산은 법호이며 숙성은 김씨이고 선산이 본향이었다.
스님은 조선 철종 13년인 서기 1863년 임술 3월 13일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에서 태어났다.
14세 때에 해인사에서 신해(信海)화상을 의지하여 머리를 깎고 사미계를 받았다. 나이 30세에 발심하여 수행의 길에 나섰는데 수윌(水月)스님과 천원(天圖)스님 등 여러 도변들과 동행하여 경허화상께 나아가 참 구하고 법을 배우고 종지를 밝혔다. 이로부터 자취를 감추고 열심히 갈고 닦아 마침내 사명대사의 적손(觸 孫)인 우송노사(友1함老師)의 법을 이었다. 그 후 스님은 퇴설당에서 조실로 계셨으며 장좌불야로 후인들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순종 2년 1908년에는 이회광이 원종 종무원을 건립 하고 대종정에 임명되어 해인사는 일본불교의 주구가 되었으므로 스님은 1913년 봄에 스스로 해인사를 떠 나 황악산 직지사로 옮겨와서 대중을 거느린 17년 동 안 교화를 크게 떨쳤다.
스님의 세수 69세인 1930년 가을에 미질(敵族)을 보였다. 그 해 8월 24일에 문언을 불러 뒷일을 부촉하니 문인 등이 묻기를 “생이란 무엇입니까?”하니 스님께 서 대답하시기를 “본래 불생이거늘 어찌 죽음이 있겠는가. 북이 서로 치고 바다 밑에 불이 나서 모두 태워버리니 천고만고에 다만 이러할 뿐이로다”하고는 말을 마치자 단정히 앉은 채로 고요히 입적하였는데 세수는 69세요, 법랍은 56세였다.
스님은 골상이 비범하였을 뿐 아니라 법문과 동량 이 출중하여 총림을 호령할 만한 인물이었으나 때를 잘못 만난 탓으로 해인사에서 직지사로 자리를 옮겨 만년을 보낸 선지식이었다.
스님의 행장 중에 최근 경봉선사와의 간찰이 발견 되기도 했으며 최근에 발간된 한암집(명정 역주)에는 한암스님께서 쓰신 그의 비문이 실려 있으므로 이 글 은 거기서 발췌하였다.
스님은 만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황악산에 들어온 지 벌써 오십년 黃岳五十年
이 아침에 비로소 산을 떠나네 分朝始出山
도솔천이 어디냐고 누가 물으면 兜率何處在
주장지를 번쩍 들어 보여 주노라 拍起打校看
2) 퇴운 원일(退雲圓日)선사
퇴운스님의 휘는 원일(圓日)이며 법호는 퇴운, 속성은 파평 윤씨였다. 스님은 1878년 (고종 14년) 정축 7월 27일에 합천읍내에서 태어났다.
15세에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서 우송스님을 은사로 하여 축발하고 계를 받았다.
30세에 발심하여 행각을 떠나 제방을 다니면서 정진을 게으르지 않게 하여 우송효댐의 법을 이으니 산선사와는 법으로 사형사제 지간이었다. 늘 사형 따르고 탁마하여 서로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제산스님께서 정축년에 황악산으로 가셨으므로 31 뒤인 병진년에 스님도 사형을 따라 황악산으로 옮겨왔다. 스님은 여러 행적으로 보아서 선사였다기보는 사판(事判)에 능한 스님이어서 그런 방면에 능력을 발휘했던것 같다.
한암스님께서 쓰신 스님의 비문에 보면 스님은 진년 봄에 각 법당과 요사채의 개와 번와 불사를 다고 기록되어 있고, 기묘년에는 문인(門人)에게 천불전 중수불사를 부탁하고 입적함도 그러함이요, 항상 근검절약하여 상주물을 아끼고 보호하여 논 100여 지기를 사들였다는 대목에서도 스님 삶의 행장이 대충 드러난다 하겠다.
스님은 이와 같이 대중을 외호하고 가람을 수호는 직책을 충실히 이행하였던 분이었다. 특히 자신산 논의 곡식은 선방의 수좌를 기르는 데 쓸 뿐 결 다른 데에 쓰지 말라고 임종시에 유언을 하였다고 하니 스님의 대중외호의 정성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스님은 세수 62세 법랍 48세였던 기묘년 4월 4일‘ 입적하였는데 지금도 황악산 직지사에는 스님의 행을 기리는 비(陣)가 서 있어서 후학들에게 귀감이 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