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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인환(印幻)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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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철순 1991년 04월 110호
우리는 흔히 어느 한 분야에서 소위 말하는 일가견을 이룬대가(大家)들은 특별한 생활을 할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지로 그런 분들을 만나서 몇마다의 이야기를 나누거나 생활상을 엿보면, 그런 생각들이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고 부끄러워질 때가 많다. 사실 그분들의 삶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아주 조그마한 일도 예사롭게 흘려버리지 않고 참으로 진지한 태도로 진솔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어느 때, 어느 곳에 처하든지 자신의 생활 리듬을 깨뜨리지 않고, 안과 밖이 결코 틀리지 않으며 일관되게 살아가시는 분이 바로 인환스님이시다.
스님께서는 40년이 넘는 승려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학문이라는 한 우물파기에 온 힘을 기울이신 분이며, 앞으로도 그 일은 계속될 것이다. 스님께서는 “별다른 재주가 없는 사람이 한 우물을 파야지 달리 길이 있느냐’며 겸손해 하시지만 학문의 길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외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자리를 우뚝 세운 분들을 마음으로 존경하는 것이 아닐까.
현재 스님께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하시는 일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선학과 교수의 직분인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이다.
요즈음은 학기가 시작되는 기간이라 몹시 바쁘다고 하시면서, “젊은 스님이나 학생들 중에는 기성세대를 무조건 부정하고 비판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 같아요 올바른 생각을 가진 젊은이라면 기성세대를 올바로 비판할 수 있는 판단력과 함께 과거의 좋은 점은 온고지신(圖故短新)해서 오늘에 되살릴 줄 아는 심지가 바로 서 있어야 해요 그때 그때의 분위기에 따라 바람부는 대로 쏠리고 흔들리며, 본말(本末)이 전도(顧倒)된 생활을 하는 것은 젊은이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요”라고 평소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점을 토로하신다.
또 하나 새 학기가 되면 스님께서는 학생들에게 본의 아닌 잔소리꾼이 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열심히 공부하라는 사랑의 잔소리다.
“불교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 된 부분이 어학실력의 부족이에요 적어도 앞으로 이땅의 불교계를 젊어지고 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어학실력을 길러야 해요. 우선 영어 ·일어 ·중국어는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공부하려면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뱃어는 반드시 익혀야 해요. 그래야만 국제무대에서 긴 안목을 갖고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요”
스님께서 이처럼 외국어 습득을 강조하시는 것은 외국에서 오랜 동안 공부해 오면서 그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라.

스님의 고향은 이북이다. 6 ·25사변의 난리통에 남으로 남으로 피난 내려와 마지막 닿은 곳이 부산인데 그곳에서 절집과 인연이 맺어졌다. 스님께서 출가한 곳은 선암사라고 하는 규모는 비록 작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내노라하는 전국의 선방 스님들이 피난 내려와 생사를 걸고 용맹 정진하던 곳이다. 스님께서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행자 노릇 할 수 있었던 것을 부처님의 큰 은혜라고 여기며 평생 감사해 한다.
“7~8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자그마한 선방에서 30여 명의 스님들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언제 또 전쟁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배수진을 친 그런 마음으로 공부하셨어요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처럼 목숨 걸고 참선하는 분위기 있는 절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이후 스님 노릇하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어요”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할 때 그 방향을 어디에다 두느냐에 일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스님께서는 이처럼 좋은 곳에 첫발을 내디디고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요즘이야 행자 과정이 그리 까다로운 것도 아니지만 스님께서 행자 노릇 할 때만 해도 요즘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엄격하고 고된 수행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요사이는 출가를 해 보겠다고 왔다가도 참을성이 없어서 몇 칠을 못 견디고 훌쩍 떠나가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때 행자 시절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예불 모시고, 선방 대중 스님들의 세끼 공양을 때맞춰 올리고, 틈틈이 밭일도 하고, 노스님의 시봉 드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낮 시간 동안은 잠시도 쉴 틈이 없어서 개인 공부는 남들이 다 자는 시간을 이용해서 벽장에 몰래 숨어서 공부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러다가 자정이 휠씬 지나서야 겨우 눈을 잠깐 볼일 수 있었는데 새벽에 일어나 보면 손가락이 퉁퉁 부어서 펴지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고단한 줄 모르고 행자 시절을 보냈어요.”
스님께서는 행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꼭 하시는 일이 한 가지 있다. 이제 그 일은 생활의 일부가 되어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지 늘 하시던 그것이 바로 백팔 참회다.

스님께서는 그렇게 하게 된 연유가 있다면서 일화 한 토막을 들려 주셨다.
“행자 생활이 조금씩 몸에 익어갈 무렵인데 하루는 그 당시 감사스님으로 계시던 석암스님께서 부르셔서 갔더니,왜 중 노릇을 하려고 하는지 물으셨어요 그때 뭐라고 대답을 했는데, 그런 허름한 생각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하시며 호통을 치셨어요. 계를 받기 전에 먼저 해야 활 일이 있다고 하시면서 지금까지 지은 입장을 깨끗이 소멸해야 부처님의 바른 법을 담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고는 백팔 참회를 시켰어요” 그렇게 해서 시작한 백팔 참회 의식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스님께서는 불도의 수행 중에서 정진을 가장 으뜸으로 꼽으신다. 우리가 특별한 무엇을 한다는 생각 없이 그저 밥 먹고 잠자듯 자연스럽게 행하는 가운데 정진력은 쌓이는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스님께서는 열 여덞 한창 나이에 출가하여 행자 기간을 마치고 선암사에서 원허(圓虛)스님을 은사로, 석암(錫岩)스님을 계시로 모시고 수계를 받은 후 석암스님의 권유로 곧바로 해인사 강원으로 가제 되었다.

“그때가 해인강원이 처음 개설되었을 때 인데 운허스님을 강사로 모시고 경전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어요 운허 스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강의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흑판 강의였어요 강원의 전통적인 논강식 공부방법의 좋은 점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모든 화인들을 대상으로 흑판에다 글씨를 써 가면서 강독해 주셨어요. 스님께서는 특히 「능엄경」을 좋아하셨는데 해박한 지식으로 유창하게 풀이해 주셔서 이해가 빠르고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스님께서는 해인사에서 3년을 보내면서 웬만한 경전공부를 두루 섭렵하고, 다시 운허스님을 따라 통도사에서 지내면서 「화엄경」 80권을 세밀히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강원에서 7~8년을 보내고 나서 스님께서는 처음으로 걸망을 지고 만행길에 오르셨다. 발길 닿는 대로, 인연 닿는 대로 걸어서 걸어서 순례의 길을 떠나셨던 것이다.
“혼자서 자유롭게 다니는 길이었지만 나름대로 질서를 지키면서 다녔어요 제일 큰 원칙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 해가 지기 전에 절집에 다다르면 걸망을 내려놓고 마당부터 깨끗이 쓸었어요 또 날이 밝기 전에 변소 청소를 깨끗이 해 놓고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또 길을 떠났어요.
그렇게 해서 한곳에서 하루씩만 보내면서 두어 달 다녔는데 하루는 오대산엘 가게 되었어요.”
스님께서는 그곳에서 값진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체험은 일생을 통해 정신적 힘을 얻게 해 주었고 살아가는 데 큰 의지처가 된 셈이다.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대관령을 넘어 오대산에 들어가 적멸보궁을 참배하고 나오는데 신심이 저절로 우러나서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계시는 스님께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기도할 수있게 해 달라고 부탁드렸더니 다행히 허락해 주셨어요.
그로부터 삼칠일 동안 용맹기도를 시작했어요 한 시간 단위로 석가모니불 정근을 시작으로 하여 백팔 참회, 참선 정진을 계속 반복하여 24시간 동안 밤을 새워 기도를 했어요 그렇게 목숨 걸고 21일간 쉼 없는 용맹기도를 마치고 회향하는 날 적멸보궁을 나서니 뜰 앞의 나뭇가지 가지마다 금색 광명을 수놓는 것을 체험했어요”
그렇게 전국 각지를 반 년 이상 다니면서 마지막으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돌고 한라산을 내려오면서 스님께서는 또 한번의 큰 전환기를 맞으셨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강원에서 해온 내전 공부를 바탕으로 좀더 현대적인 공부를 계속해 보려는 것이었다.그 당시만 하여도 스님들이 대학에 가서 공부하는 것을 상당히 금기시하던 시절이었는데 스님의 학문에 대한 진실한 욕구는 오히려 격려와 후원을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1964년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칠 때까지 당대의 훌륭한 석학 밑에서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공부에 무슨 끝이 있을까마는 스님의 공부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왕 시작한 공부이니 그 뜻을 넓혀 외국으로 유학 갈 생각을 하게 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고 했던가. 일본 조동종의 구택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간곡한 편지를 그곳 총장님께 보내어 서신이 오고 간 끝에 결국 길이 열렸다.
그래서 일본으로 유학가게 되었는데 스님께서는 혼자의 힘으로 구택대학과 동경대학‘에서 각각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그 어렵기로 유명한 동경대학애서 1976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스님께서는 일본에서 10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어학공부를 더 계속할 생각으로 이번에는 미국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국과 캐나다를 중심으로 지내면서 해외포교에 관심을 갖고 그곳에서 막 뿌리를 내릴 즈음에, 모교인 동국대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해 달라는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스님께서는 지금까지 공부한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서 교단에선 지 올해로 만 9년이 된다고 한다.
그 동안 정각원 원장, 불교대학 학장을 역임하셨으며 현재는 동국대 선학과 교수 및 불교문화연구원 원장으로 계신다.
또한 「신라불교연구」 「신라-불교계율사상연구-」 동의 저서와 선사상 및 신라불교에 관한 많은 논문을 쓰셨다. 스님께서는 그 동안 공부해온 것을 큼직한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을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대담을 마치고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의 통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책으로 가득 메운 스님의 방, 환희당(歡喜堂)을 나오면서 늘 웃으면서 산다는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글/ 이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