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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명의 청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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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기영 1991년 04월 110호
나는 자본주의와 의회 민주주의와 개인 중심의 자유주의, 이러한 현대 서구문명이 기독교문명이라고 일컬어진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이 세가지 현대문명의 장점만을 보고 너도 나도 이 길을 다라 자기네 생활 패턴을 맞춰 가려는 풍조 속에 살고 있음을 본다.
나는 이 세가지 주의주장(主義主張)이 무조건 우리가 귀의할 만한 사상이며 생활원리이며 체제이며 제도가 아니라는 견해를 표명해 온 지 오래다. 그래서 나는 대중불교의 철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경제사상, 정치사상, 문화사상을 개척하고 창조해 가야 한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그 첫번째 문제제기로 경제사상과 관련해서 몇 가지 원칙적인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자연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옹호하는 근본적 원칙을 거역하거나 위반함이 없이 우리의 모든 경제활동을 이룩해 가야 한다는 점이다.
자연은 우리들 인간의 근원이다. 땅과 물과 산과 숲과 공기와 그 안의 모든 생물이 원만한 유기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종합적인 자연보호 자연존중의 법률을 제공하고 그것이 엄격히 준수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때 독일의 젊은이들이 녹색당을 만들어 자연에 대한 훼손을 막고 아름답게 가꾸며 그 정신으로 인간과 인간이 상호 평화와 협조의 낙원을 만들고자 외치며 일어섰을 때, 독일의 뜻 있는 일말의 청풍(淸風)처럼 불어오는 희망의 바람이라고 환영했던 일들을 상기한다.
바로 불교문명은 이런 자연외경(自然畏敬) 자연존중의 문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유재산이라는 고정관념도 모든 재산의 국유화라는 독점적 소유의 관념도 지양하는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지혜이며 자비이지 재물이 아니요, 명예나 권세가 아니요, 무제한한 본능적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널리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지혜라 함은 족한 줄 아는 것이며, 사혜(思惠)를 아는 것이며, 나라는 존재는 잠정적(暫定的)으로 맡겨진 대우주의 생명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나라는 개인의 진정한 내가 아님을 아는 것, 모든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불가분리(不可分離)의 연관을 가진 존재로서, 횡(橫)으로 시방의 모든 동(同)시대인은 물론 종(縱)으로 삼세의 모든 조상과 후손들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일, 이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나 개인의 존재, 이익, 쾌락만을 생각했을 때, 그 나는 참된 나를 배반하고 참된 나를 파괴하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투철하게 인식하는 것, 이것을 일컬어 지혜라 한다는 사실을 알자는 것이다.
자비라는 것은 그 모든 다른 존재들에 대한 한량없는 연민, 한량없는 봉사, 보은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소유하고 독점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중생이 참되게 살 수 있게 끔 꼭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공급해 주기 위해 일하며 생산하며 분배하는 것이지 나 혼자만의 한없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원칙을 준수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소유와 혜택을 인위적인 공작으로 얻어졌을 경우 그것은 모두 다법에 어긋나는 것, 불법의 것으로서 반드시 그 소유, 그 혜택은 후일의 화근이 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잘 알고 살아야 하는 원칙이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세가지 원칙만을 제시 하였지만, 이 세가지 원칙은 지금 내가 만들어낸 원칙이 아니고 불교가 만들어낸 인위적, 인공적인 원칙도 아니다. 원칙들은 머나먼 태고 때부터 아니 우주가 있기 시작한 그 첫날 때부터 아니 우주가 있기 시작한 그 첫날부터 인간들이 무슨 무슨 문명, 무슨 무슨 주의를 만들어 내기 훨씬 이전부터 이 우주자연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옮겨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있는 그런 원칙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자각을 해야 하는 것일 따름이다.
불교문명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청사진을 그리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정치풍조이다.
불교문명의 청사진 그 세가지 경제활동의 원칙 중,
첫째 자연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옹호하는 것이 인간의 정도라는 근본적인 원리, 둘째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지혜의 터득과 자비의 실천이지 재물이나 명예, 권세의 향유, 무제한 한 본능적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는 원칙, 셋째 경제 활동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이 참된 인간, 성숙한 인간이 되도록 하는 데에 있다는 원칙, 이 세 가지로 요약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원칙들은 인간의 경제활동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활동에도 적용이 되는 일반적이며 철학적인 원칙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수서사건을 불교를 중심으로 구축될 새로운 문명의 정치적 측면에 대해서 생각하는 하나의 study case로서 거론을 하려 한다.
수서사건, 나는 그 모든 내막이 남김없이 다 밝혀진다거나, 쉽게 망각된다거나 가볍게 취급돼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수서사건은 현대자본주의 경제구조에 입각한 정치제도하에서는 결토 예외적인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대소 규모의 차이는 있을 망정, 유사한 성질의 행태(行態)들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직시하고 이 구조, 이 제도 자체를 고쳐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 생각해 보자. 여기 유능한 한 세무공무원이 있었다. 자기 자본보다도 줄만 잘 대면 (인맥·혈맥·지방맥·학맥) 은행 융자를 잘 받아 건설회사를 차릴 수 있다. 모든 인(認)·허가(許可)의 권한을 권 자가 바로 권력자다. 정치권력이든 행정권력이든 사법권력이든 이권력의 어느 하나와 불가분의 인연을 금전중여 ·뇌물증여로 맺으면, 반대급부(反對給付)가 돌아오고, 이것이 지금의 체제하에서도 불법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장본인은 법망을 피해 합법성을 꾸미는 명수이다.
어떤 종류의 권한이라도 가지고 있는 자들로서는 돈이 제일 귀한 것이다. 말단공무원에서부터 국회의원측은 장·차관·정당 총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을 매수하고 특권을 매수하고 향락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은 50년대나 60년대처럼 가난해서가 아니라 더 누리며 더 호화 사치스럽게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이제 지방의회 선거가 막 시작되는 판인데 자기 정당세력을 많이 심어 놓으려고 수서사건을 좋은 이슈로 이용하는 쪽이 있어 당하는 사람으로서 는 당혹한 일이겠지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지 국민들은 그런 작태에 더 이상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은 본래 그렇게까지 돈만 아는 사람들은 아니었고 잘못된 배금주의 사상, 개인주의 ·향락주의 사상이 외국으로부터 들어와서 그렇게 된 것이다. 무엇을 고쳐야 되는가? 사고향직과 철학, 그리고 제도이다. 그리고 국민들의 생활 태도이다. 이러한 개혁과 혁명의 방향으로 권력과 금력과 조직력을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문명 동양사상을 바탕으로 한 문명을 이야기하면서 그 첫번째 원칙을 자연의 법과 질서에 대한 순응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러한 이치를 잘 알게 하는 것에 한산(寒山)의 시적직관(詩的直觀)이 있다.
사람이 묻네, 한산의 길을(人問寒山道)
한산엔 길이 불통일세
여름인데도 얼음이 아직 녹질 않았고(夏天水未釋)
해가 솟았는데도 안개가 자욱하다네(日出薰魔廳)
내 모양 흉내낸다고 어찌 여기에 오겠는가(似我何由屆)
그때와 나 마음이 같지를 않네(與君不同)
그대 마음이 만약 내 마음 같다면
그때 오히려 그 속에 올 수 있겠네(還得到其中)

여기 이 시에서 말하는 한산은 산의 이름이자 사람의 이름이자 그 사람 마음의 이름이다.
전우주 위에 우뚝 솟은 고봉정상(孤峯頂上), 음 ·양이 갈라지기 전 무음양(無陰陽)의 정상, 세계의 만가(萬家)를 초절한 곳, 상 적광토(常寂光), 향상 고요하기 그지 없으면 서 광명이 깃들인 땅 광대무변한 불섬, 그 마음속의 여의주, 법신불, 이 것은 한산이란 말을 의미하고 있다.
이 한산으로 가는 길을 사람들이 묻는다고 했다. 멀리 저 산 밑에서 이 아름다운 산봉우리를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길을 묻는다는 것은 당연한 인지 상정일 것이다.
그 봉우리까지 쉽게 갈 수 있는 수단방법은 없는가 하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할 것이다. 케이블카는 없는가, 헬리콥터는 없는가,
그런데 ‘한산엔 길이 불통일세’라고 대답한다. 앞의 길은‘도(道)’요 뒤의 길은 ‘로(路)’라 했습니다. 도는 있겠지만 로는 없는 것이다.
유마거사가 부루나존자에게 대도를 가고자 하는 자들에게 소로를 가르쳐 주지 말라고 했던 구절이 생각난다. 헬리콥터도 케이블카로도 거기에는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는 여름인데도 얼음이 아직 녹질 않았고 해가 솟앗는데도 안개가 자욱한 곳이라고 했다. 이해하기 어렵고 믿기 어렵고 따라가기 어려운 비상한 각오가 필요한 곳이다. 가벼운 형식적인 흉내도 이해되고, 도달된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모양 흉내낸다고 어찌 여기에 오겠는가’ 민주주의도 좋고, 자유도 좋다. 그러나 그 흉내, 그 형식의 모방만으로 그 소기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대와 내 마음 같지를 않네. ’
‘그대 마음이 만약 내 마음 같다면, 그때 오히려 그 속에 ‘올 수 있겠네.’
한산이란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한산의 겉 모양은 누더기를 입은 청빈한 거사의 차림이다. 그?겉모양을 닮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데 지금이 시(詩)에서는 그런 형식적 모방과 흉내 따위가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마음이 문제다. 내 마음과 같은 겨울의 마음, 잎이 다 떨어진 벌거숭이 마음, 눈 덮인 싸늘한 바위와 같은 마음, 죽은 것 같으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간직하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 까닭 없이 이 마음을 갈고 닦아보면 어느날 갑자기 그 얼음의 계곡, 그 안개 낀 산허리를 뛰어넘어 고봉정상에 오를 날이 온다. 이 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도기중(到其中, 그 속에 도달한다)이라는 마지막 한마디가 아주 의미심중하다 싶다. 도피안(피안에 도달한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피안과 도기중을 같은 뭇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바라밀다행을 실천하고 있을 때 이 세상은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고, 그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대 자유인이 된다. 목표가 멀리 있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피안이라 하겠지만, 기실 그 피안은 우리들의 현실속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