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일념수희(-念隨喜)앞에서 법설주 ·비설주 ·인연주의 삼주설법(三周說法)이 끝나는 것에 의해 정종분(본론)은 일단 막을 내리고 여기서부터는 「법화경」을 펴서 끊이지 않도록 권고하시는 유통분(流通分)에 접어든다. 그리고 「법화경」의 유통이라 해도 내가 곧 부처라는 확신 밑에서 부처로서의 길을 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은 뻔하므로 부처님은 약왕보살을 상대하여 이리 설하신다.
“약왕아, 네 보느뇨, 이 대중 속의 무량한 천신용왕·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 ·긴나라·마후라가 따위의 인비인(人非人)과,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와, 성문 구하는 자, 벽지불 구하는 자, 불도 구하는 자, 이런 등속으로 모두 다 불전(佛前)에서 「묘법화경」의 한 게송이나, 게송 중의 한 구절 듣고 잠시라도 기뻐하는 자에게는 내가 다 기(記)를 주리니, 마땅히 아욕다라삼막삼보리 얻으리라.”
그리고 다시 이렇게 이르셨다.“또 여래 멸도한 후, 만약에 사람 있어 「법화경」의 내지는 한 게송 ·한 구절 듣고 잠시라도 기뻐하는 자에게는 내가 아욕다라삼약삼보리기(阿廳多羅三觀三普提記) 내리노라.”
어떤 중생이건 「법화경」의 한 구절을 듣고 잠깐이라도 기뻐하는 자는 다 성불하심을 보증하신 말씀이신대, 이것에는 깊이 생각해야 할 점들이 포함돼 있다.
첫째로 문제되어야 활 것은 중생을 대하는 부처님의 시각이시다. 이르는 바 천룡팔부(天龍八部)와 사부중(四部聚)과 삼숭인(三乘人)이 열거되었으므로, 성불에서 제외된 부류는 어디에도 없음이 되어, 소승을 거기에서 배제하던 종래의 대승과는 크게 다르다. 이는 개권현실에 의해 모든 가르침이 바로 일불승이라 단정하신 끝에 부처님의 교화대상은 보살뿐이어서 일체중생은 예외 없이 보살이라 밝히신 터이니까 당연한 말씀이긴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 하나의 중생을 천룡팔부에서 삼승인에 이르는 부류로 규정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가령 성문·연각·보살이라 해도 악한 생각에 지배될 때에는 야차·아수라로 바뀌는 성문·연각·보살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느 하나에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건, 선 쪽으로도 악 쪽으로도 바뀔 수 있는 유동성(流動性)을 띠고 있고, 그러기에 어떤 중생에게나 성불의 가능성이 있다 함이 부처님의 중생관이시니, 바로 여기에 정법의 유통을 중생 모두에게 기대하신 근거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그렇다 해서 중생의 온갖 상황이 다 성불로 이어지고, 유통을 감당할 만하다는 것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법화경」의 한 구절이라도 들어 기뻐하는 마음이 생기는 일, 곧 일념수희(-念隨喜)가 요구되는 것이니, 이것은 중생 쪽에 가해지는 최소환의 조건이자 근본적인 조건이다. 일념수희는 부처님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음을 뜻하고, 나아가서는 부처님의 세계에 한발을 들여놓았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작은 선섬(信心)의 불씨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자체는 작지만 용 마음까지 태울 힘을 지니고 있는 점에서는 결코 작기만 한 것도 아니니, 그러기에 일념수회는 성불을 약속하는 불씨가 되기에 족한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경 전체도 아닌 한 구절의 수희로도 족하다는 것인가 그것은 절대적 진리의 속성 때문이니, 전체와 부분의 크기가 같음이 그것이다. 우리들이 처해 있는 상대적 세계에서는 전체의 일부가 부분이므로 전체는 크고 부분은 작다. 그러나 대소의 대립이 사라진 것이 절대계이므로, 거기서는 전체가 부분이요 부분이 전체이다. 이것으로도 이해가 안간다면, 수학에서 무한을 다룰 때의 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무한한 지폐를 지닌 아버지가 있다 하자. 그리하여 열 명의 아들에게 지폐를 나누어주되, 지폐번호의 끝의 숫자가 1인 것을 큰 아들에게 주고, 내지는 열째 아들에게는 끝자리가 0인 지폐를 주었다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아들 한사람마다 받은 몫은 아버지의 소유의 1/10이 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폐는 무한하므로 끝자리가1·2-----0인 지폐 또한 무한할 수밖에 없으니, 십등분했다 하여 지폐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설사 그에게 만명 ·억명의 아들이 있었다 해도 사정은 같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세계의 비밀인 것이니, 부처님의 한 언구는 부처님의 말씀 전체와 동일하다. 그러기에 천태대사는 ‘시명정진(是名精進) 시명진법공양여래(是名眞法供養如來)’·라는 약왕보살본, 사품의 글에서 크게 깨닫고, 육조(六祖)는 금강경의 ‘웅무소주이생기심(應無升住而生其心)’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 대오했던 것이니, 법화경으로 치자면 맨 처음의 ‘여시아문(如是我聞)’에서는 아직 못 깨달으며, 맨 끝의 ‘작례이거(作禮而去)’에서는 왜 못 깨닫겠는가 이것이 불경이 지니는 비밀이다. 또 전체와 부분이 같기로는 일념도 마찬가지다. 이
말에는 ‘한 생각’의 뜻과 ‘한 순간’의 뜻이 있거니와, 시간의 실체(實體)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볼 때는 끝없이 일어났다 꺼지는 마음의 의식이 바로 시간의 정체여서, 한 생각과 한 순간은 기실 같은 말임이 된다. 그리고 설사 따로 떼어서 고찰한다 할지라도, 순간과 영원은 다름이 아니라 순간이 곧 영원인 것이며, 또한 한 생각을 떠나 따로 마음이 존재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경을 읽을 때는 늘 한마디 말씀씩 받아들임이 사실이듯, 수희 또한 언제나 일념의 수회인 것이니, 일념의 수회를 떠난 어떤 수회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일구(一句)에 대한 일념수회에 수기하신 것은, 당연하시다 해야 할 것이다.
ㄴ. 오종법사(五種法師)
일념수회에 위에서와 같은 중요한 뜻이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 족할 리는 없다. 수희는 결국 신심이 발생한 단계인 데 그치므로,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법화경의 내지는 한 게송이라 할지라도 수지 ·독·송·해설 ·서사’할 것을 요구하셨으니, 이것이 오종법사다. 수지(受持)는 법화경을 받아들여 지니는 뜻이요 독(讀)과 송(調)을 읽고 외움을 이르는 말이어서, 이 셋은 처음부터 자리(自利)에 기운 점에서 어떻게 법사임이 되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가 체득한 것이 없다면 무엇을 설할 것인가 그러므로 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얻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법사의 기본적 요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해설(解說)은 설법이요 서사(書寫)는 경을 남들에게 얽히기 위해 베껴 쓰는 일이므로, 이 둘이 법사로서의 면목을 발휘하는 것에 해당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종법사가 되기를 부처님이 기대하신 대상이다. 법화경이 법사에 의해 전파되어야 할 것은 당연하다 해도, 꼭 대보살이나 대아라한 같은 성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은 기껏 일념수희한 부류들이므로 거기에는 아수라니 야차 같은 무리까지 포함돼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불법의 흥망이 걸린 중대사를 그들에게 위촉하시느냐는 의문이 안 생길 수 없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부처님은 중생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계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중생은 모두가 불완전한 터이므로,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부처님의 그 같은 기대에 부용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라해도, 중생 속에 깃들어 있는 한 가닥 신심 말고 어디에 기대하실 데가 있겠는가 불법은 처음부터 백프로 중생을 위해 존재하는 터이므로* 중생에게 기대할 수 없다면 불법의 존재 기반은 깡그리 무너지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다가 대아라한이니 대보살이니 하는 성자들도 중생 아닌 어딘가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며, 부처님 또한 ‘중생’이라는 이름의 대학출신이신 것이다. 그러기에 법화경의 유통을 성자들에게 위촉하시는 것과 범부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동일한 일이 된다.
그리고 부처님 멸도 후라면 불법의 운명은 어차피 중생들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이를 훌륭히 꽃피우건 죽을 쑤건 그들의 뜻에 일임된 상황인 것이다. 그러기에 일념수회에 기대하시고 오종법사를 찬양하신 것이니,
“알지어다. 이 사람은 여래의 사절(使節)이며, 여래 보내심이라, 여래의 일 행함이니.”
라 하셨 듯, 이들이야말로 부처님의 대리자인 것이다.
그 하나 하나가 완전한 대리자인 것은 못되나, 제능력에 맞게 법화경의 유통이라는 큰 불사를 거드는 점에서 부처님의 대리자다. 그리하여 불완전한 채 서로 협력해 부처님을 대신할 책무가 우리 모두에 있고, 그 기여함이 커질수록 부처님 쪽으로 접근해 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