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임이 끊이지 않았던 불교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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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경녀
1991년 03월 109호
누군가가 나에게 코스모스 소녀라는 별명을 붙여줄 즈음에 관음보살의 명호는 내게 다가왔다. 당시에 나는 음악대학을 열망하고 있었는데 음악적인 모든 것에 대한 동경 위에 노래부르듯 염(念)관세음을 수놓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냥 그저 그렇게 옛부터 해왔던 일을 계속한다는 기분이었을 뿐 특별한 감회는 없었다. 물론 칭관음의 공덕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없었다. 휴양차 산사헤 머물고 있던 한 지인(知人)으로 부터의 향그러운 봄꽃 소식에 묻어온 자연의 -눈웃음 같은 것이었다.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 불교학생회의 서클활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 미묘한 웃음 뒤의 희미환 윤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 과교수, 학생들의 거의가 기독교 인이었던 곳에서 스스로 불교색을 표방한다는 것은 확고한 신심이 뿌리를 내리기 전의 여린 마음으로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본격적인 신앙생활의 시작이었다고나 할까. 나 자신조차도 감탄할 정도의 굉장한 열성을 가지고 학생이라는 신분상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한 수련생활에 몰입했다. 마치 한 톨의 꽃씨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잎과 줄기가 벌어져 무성해 지는 것처럼. 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의 모교에서 음악선생으로 교단에 서게 되었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고찰을 둘러보고 숨겨 놓았던 보물을 발견한 듯 환희심을 내어 불교학생회를 맡게 되면서 무언가 포교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부끄럼 없이 덤볐던 것 같다.
불기 2526년(1982년) 사월 초파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읍내의 허술한 극장과 문화원의 무대 위에 수십개의 붉은 연등을 밝히고 나름대로의 성탄축하 행사로 불교음악 연주회를 가졌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대구의 은적사 부설 룸비니유치원 어머니 합창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는데, 한 가닥 선구자로서의 자부심 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일로 3년간이나 부처님께 본의 아니게 누를 끼친 것만 같아 죄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도 불교음악이라는 거창한 명제의 둘레를 맴돌고 있는 무리 중의 한 사람으로 남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때가 무르익으면 맺혔던 꽃봉오리가 활짝 만개할 날이 반드시 올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다음 세대들에게 단탄하게 잘 여문 좋은 씨앗을 떨어뜨려 줄 날도 기대해 본다.
지금 돌이켜 보면 짧은 이력이나마 그 속의 보이지 않는 고리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연결되어지는 일련의 사건들로 엮어져 있었음을 눈치채게 띈다. 내가 태어난 곳은, 큰 길 건너편 작은 시골 교회 청탑 꼭대기의 십자가가 낮게 엎드린 오래된 기와집 지붕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있는 것이 유난히 돋보이는 집이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교회의 종소리에 익숙해 지며 자랐고 크리스마스 때는 비록 차가운 교회 마룻바닥의 간이무대일방정 유년시절의 추억을 은빛불결로 반짝이게 하는 꼬마 스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며 보냈다.
어린 시절의 첫눈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기억은 아직도 가슴속에서 향수를 불러일으킬 때가 있는데 철이 든 이후의 행적은 어쩌면 그렇게 동떨어진 곳에서 이뤄졌을까? 생각이 이에 미치면 흔히들 말하는 불연(佛蘇)이라는 낱말에 대해 조금은 진지하게 숙고해 보게 된다. 허나 어떤 명확한 동기부여 내지 논리 정연한 사상적 이론의 전개에 앞서 강하게 나의 뇌리를 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하게 되는 말이긴 하지만 아승지겹 전부터 쌓아온 업력에 의해 아뢰야식에 새겨졌을 습기(習氣)에 대한 인지(認知)의 불꽃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금생에서의 체험에 의해 습득된 것은 아닌 것이다. 나의 둘레에 있던 조건·환경·모든 외부 상황이 누군가의 타의에 의한 것이라는 분별의식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때의 늦은 봄날 오후에 불현듯 그것은 불거져 나왔다.
조금씩 조는 듯 마는 듯 턱을 괴고 툇마루에 동그마니 앉아 있던 나의 머리에 졸음이 깜짝 놀라 달아날 만큼의 큰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자기인식을 떠난 세계의 존재여부에 관한 의문이었다. 국민학교 하급생 정도의 어린 나이에 너무 감당키 어려운 문제여서 현기증이 나고 약간의 멀미증세까지 겹치던 순간의 암흑 속에서 섬광처럼 번쩍 빛나고 사라진 것은 생에 대한 전긍정의 표식인 원(圓), 공(空) 그리고 끝없는 적막(寂)이었다. 그러한 찰나적 경험을 치졸한 필력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미숙한 짓거리임에 틀림없겠지만, 현상세계에서의 어쩔 수 없는 모순으로 일단은 밀쳐두고 싶다.
그 이후로 나는 당시의 그렇게 생생하고 미묘한 정신적 콜라이맥스 상태를 경험하지 못했다. 먼지가 끼이듯 망각의 장(章) 저 편에 파묻혀 까맣게 잊혀졌다.
나의 부처님을 향한 행로란 점진적이었다.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이나 남다른 수행에서의 개인적 내밀한 정신력 상승 같은 것은 ‘해당사항 없음’에 속한다. 또한 생활인으로서도 큰 굴곡 없이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앞에 예를 든 것도 어쩌다 무의식의 일단(一斷)이 삐어져 나온 것뿐이지 현실적 대안을 가지고 크게 발원한 일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우리집의 미약 하나마 대물림이 끊어지지 않았던 불교집안으로서의 내력 같은 것이 지금의 나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가물가물 하던 시절 우리집 문지방을 자주 밟던 용천사의 비구니 스님이 떠오른다. 먹물들인 그 뻐덩덩한 장삼자락, 통넓은 바지가랑이(옛날에는 그 큰 바지가량이가 참 무서웠다. 스님은 곧잘 ‘부모님 말씀 잘 안 듣는 놈은 이 속에다 넣어 절로 데려갈끼다’ 하시며 으름장을 놓곤 하셨다)도 떠오른다. 어쩌면 그 스님이 문지방을 넘나들던 그 시절에 이미 알게 모르게 바지가량이 사아로 인연의 씨앗을 뿌려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저러한 연유로 나의 초발심은 나의 탄생을 알리는 고고의 울음소리로 시작되었을 것이고 생의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끝없이 이어지는 엽연의 고리 위에 관조(觀照)의 빛을 드리우는 것으로 완성되며, 이미 옛 작은별의 꿈이 깃든 그 마음자리에서 다시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눈먼 그리움의 향연 같은 보살심으로 사랑의 세상을 보듬으며 살아기는 것으로 일단락 짓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