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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無言)의 힘으로 눈물을 쏟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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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해인 1991년 03월 109호
서산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이면 공연히 가슴이 아리고 표현할 수 없는 공허와 허탈감에 빠지곤 했었는데, 국민학교 4학년 시절부터 시작되어 근 이십여 성상(星露)을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알수 없는 일이지만 허허로움에 견딜 수 없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남달리 사고력이 뛰어나거나 조숙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오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국민학교 3학년 때, 이미 언니 셋은 결혼하였고, 중1 때 바로 위 오빠가 결혼을 하여 거의 혼자 자란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몇몇 친구집과 서점, 수예점 밖에는 모를 정도로 집안에서만 지냈던 내성적이고, 아주 소극적인 숙맥(寂奏)이었다. 반면에 여간해서 모든 것을 부모님과 상의하여 결정하는 일이 없이 혼자 결정할 정도로 고집도 세고 별로 어리광을 부린 기억이 없는 막내였다.
그런데, 종교와는 무슨 인연인지 몰라도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5학년까지는 교회에 열심히 나갔는데 일요일이면 아침 일찍 가서 차가운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기도하곤 했는데, 그때 무슨 기도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한 인연이 고등학교 1학년, 어느 가을 시험 기간 중에 우연히 친구의 책상 위에서 발견한 팜플렛을 인연으로 친구 따라 조계사 중·고둥학생 법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찰에서 학생회 법회를 하는지는 전혀 몰랐었다. 어머니 따라서 가끔 절에 가봤지만, 이상한 일은 교회에서는 손모아 기도도 잘하던 내가 일주문 밖에서 합장하고 들어가라고‘하면 쑥스러워 그냥 들어가고 말았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러던 내가 조계사 대웅전에서 그 어렵던(그때는 삼배하는 것이 무척 어렵게 느껴졌다) 삼배를 마치고, 다다미가 넓고 길게 깔린 불교회관에 들어가는 순간 너무나 놀랐다. 근 이백여 명의 남녀 중·고동학생들이 경을 독송하고 있었다. 그것이 「천수경(千手經)」이라는 것을 법회가 끝난 후 알았지만 그 당시 내가 들어갔을 때에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는 모양이었다. 모르는 나는 뒤에서 키득키득 웃을 수밖에. 그 주문이 왜 그렇게 우스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법회가 시작되어, 삼귀의(三歸依)를 하고 찬불가도 하고 반야심경도 독송한 후에 법문 시간이 되어 내생에 처음으로 설법을 들은 것이 무진장 스님의 ‘팔정도(八正道)’였다.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환회심이 나고, 내가 왜 지금까지 이러한 법을 몰랐을까 안타까웠고, 바로 이것이다, 내가 공부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법회가 끝난 후, 나는 곧장 서점으로 가서 「천수경」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 무슨 비밀이라도 비장 되어 있는 듯 안으로 문을 잠그고 아래 씌어진 해석과 함께 대조혜 가며 ‘정구업진언’부터 차례로 읽어 내려갔다. 원는 도중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는데 ‘발원이귀명례삼보’까지 다 읽고는 믿고 공부해야 할 것은 불교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신섬(信心)이 저절로 돈발(願發)했다. 그후로는 일요일만 되면 법회에 꼭 나갔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번도 법회에 빠진 일이 없었다. 법회날에는 한두 권씩의 책을 사 가지고 왔는데 그때 읽었던 책의 기초지식이 지금 큰 자랑이 되고 있다.
여름·겨울로 행해지는 수련대회는 빠짐없이 참가했는데 산 좋아하고 물 좋아하는 성격에 여름의 시원한 계곡과 눈 덮인 겨울 산사(山寺)는 온통 내것이었다. 아침예불 시간이 제일 신심이 났는데, 가사·장삼 수하고 질서 정연하게 예불 모시는 스님들이 부럽기까지 했었다. 더더구나 한손으로 장삼자락 잡고 칠판 가득 한문을 내려 쓰며 강의하는 스님의 모습은 어떠했으랴. 부러움 천지였다.
수련대회를 마치고 온 며칠 동안은 추운 겨울에 얼음장 깨고 세수하고, 모두들 잠들어 있는 새벽에 일어나 예불 모실 스님들이 자꾸만 생각나서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 모시고, 「천수경」 ·「금강경」 ·「원각경」 보안장을 독송하고, 좌선을 하는 등 출가(出家) 예행연습을 하였다. 그러다가는 나태한 일상에 젖곤 하였지만 수련대회는 내게는 신선한 청량제 역할을 하였다 그로부터 길을 지날 때에는 잿빛 승복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먼 곳에 있어도 조계사 범종소리가 귀에 잘 들려왔다.
생각해보면 성격도 성격이겠지만 좀 남달랐던 것은 즐겁고 행복한 뒤의 외로움이었다. 아무리 밖에서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 있었어도 집에 돌아와서는 늘 쓸쓸하고 외로웠다. 한세상 살아가면서 자기 생활이라고는 전혀 없는 삶올 살기에는 생활이 어떤 색깔과 빛깔로 채색되어 올지 두렵기조차 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원초적(原初的)인 외로움을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더욱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날 고운사에 계시는 근일 큰스님을 뵙기로 했다. 절에 도착해 이틀을 지낸 후에 벌 수 있었던 스님께서는 절을 하는 도중에 출가를 권유하셨다. 인생에 있어서 좋은 기회가 그리 자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도 있고 알면서도 놓치는 경우도 있다. 이 기회에 한번 점검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굳게 결심했다. 크게 한번 버려 보겠다고 눈푸른 납자(衲子)에로의 열망이 이제 이루어지려는가.
출가를 결심한 한달 후쯤의 어느 날, 시내에 있는 사찰에 갔었다.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어느 스님이 들어오셨는데 한눈에 바로 선객(輝客)인 줄 금방 알아차릴 만한 분이었다. 몇 시간 앉아 있는데 일거수 일투족이 시종일관 공부하는 수행인의 모습이었다. 나는 남몰래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참수행인의 안으로 향한 눈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밖으로 치닫는 현대인의 눈이 아니라 고요히 안으로 내면을 관조(觀照)하는 진수행인(眞修行人)의 자태를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말 한마디 안하고도 남을 울리게 하는 저력이 무엇일까. 아! 이것이다. 내가 출가하여 공부할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옛 조사(觀師)들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두 다리 뻗고 울었다는데, 차원은 물론 다르겠지만 어릴적 허허로움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출가란 마음이 떠나야 하는 것. 가끔씩 잠재되었던 번뇌가 크게 부각되어 오는 날도 있다. ‘참선수투조사관 묘오요궁심로절(參輝須透祖師關 妙悟要窮第心路總)’이라 하였는데 어느날이 심로절(心路總)할 날인지. 혼한 것은 귀하지 않다. 다이아몬드가 귀한 것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적게 간 길, 가지 않은 길을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