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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어둠 속에서 방황했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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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무심 1991년 03월 109호
우리집은 한국 개화기(開化期), 그러니까 비교적 일찍이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고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를 믿어온 집안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모태 신앙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엄격하고도 신념에 찬 기독교인이었다. 나는 유년(幼年)시절에 나의 집안의 신앙인 기독교 외 딴 종교가 있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기독교 신자는 그렇게 많지 않을 때였다. 기독교 신자라면 예수쟁이라고 흉을 보던 때였으니까. 따라서 일요일이 되면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가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혹시 길거리에서 스님을 보거나 친구를 따라 절에라도 갈라치면 그 울긋불긋한 단청빛이 왜 그렇게 무섭게 다가왔는지 내 머리 속에는 언제나 단청빛은 상여빛과 동일한 죽음의 빛깔이었다. 또 그 향냄새는 어쩌면 그렇게 역겨웠던가. 가만히 향연기가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지옥의 유황불을 상상하곤 했다.
이런 생각들은 그때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아주 일방적이고 완고한 고정관념이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의 생각들은 악의에 찬 전도사들이나 목사들의 설교에 영향 받았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나의 이러한 신앙관은 중학교를 가고 사춘기를 맞으면서 서서히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맹목적으로 부모님을 따라다니던 교회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비판이 생기고 일방적인 신앙에 대한 강요와 언제나 같은 방식의 설교에 진력이 나기도 해서 가끔 무엇을(예를 들면 왜 하느님은 에댄동산을 지으시고 유혹과 선악과를 함께 만들었는지 등등) 물어보면 그들의 대답은 언제나 천편일률적이어서 조금만 더 깊이 물으면 집안에서도 목사까지도 나를 이단으로 몰아 붙이는 것이었다. 그때 이런 식의 태도는 곧 사훈기의 특유한 반항심과 함께 늘어가기만 했다.
급기야 나는 집안에서도 교회에서도 문제아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 교회하고도 냉담하게 되고 집안에서도 미움덩어리로 아주 버린 자식이 되어가기 시작하면서 나의 반항은 계속 심해지기만 했다.
온통 나를 마귀의 자식쯤으로 생각할 때 나는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불교 서적, 그때만 해도 불교 출판물이 영 없었던 때라 어렵게 구한 김달진 씨가 번역한 「법구경」이 내 책가방에 담기면서 나의 신앙은 영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고만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수업 틈틈이 도서관에서 「채근담」을 비롯한 「논어」 ·「맹자」등의 동양의 고전들을 탐독하면서 새롭게 동양문화에 눈이 뜨여 갔던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반항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즈음 나의 종교관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재법 이론 또한 여물어져 종교적인 대론(對論)에서 나의 반박은 치열해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종교적 대론처럼 끈질기고 집요하고 허망한 것이 또 있을까?
차츰 설득은 고성(高聲)으로 변하고 나중에는 아무도 나와는 상대를 하지 않으려고 할 즈음 대학에 갈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불교신자가 되었다거나 무슨 뚜렷한 이방 종교인이 된 것은 더욱 아니었다. 다만 바른 신앙이란 무엇이며, 바른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보다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데 더 많은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그들이 잘 설득만 했더라도 나는 아마 지금쯤 스님이 되지 않고 목사가 되었을 것을, 무조건적인 신앙의 강요가 그토록 반항하게 된 원인이었다.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나의 학업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겨우 바닥을 면할 정도였다. 그러니 자연 나의 대학시험은 낙방이었다. 그래서 집안에도 면목이 없고 어디 좀 도피하고도 싶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각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비교적 멀지 않은 해인사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한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해인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였다. 지금 그 스님은 동국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계시지만 그 당시에는 해인사에서 수학하고 있는 학언이었다. 우리들은 그 당시 둘다 젊고 의기 투합하여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무수한 이야기들을 했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그 많은 이야기 가운데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 스님의 말은 “우주가 무엇이니, 인생이 무엇이니, 종교가 무엇이니 하는 것보다 먼저 자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될 것 아니겠느냐’는 말이었는데 이 평범한 말이 그 당시에는 어쩌면 그렇게 신선하고 충격적으로 와 닿았는지 깨달음을 얻는 기연(機緣)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나는 그날로 머리를 깎고 싶다고 했더니 여기는 너무 집이 가까워 곧 가족들이 찾아와서 안될 것이니 좀더 먼 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그 스님의 제안을 따라 오대산으로 가기로 결정하자 그 스님은 친절하게도 약간의 돈올 내어 주면서 차비로 쓰라고 했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길이 바로 나의 출가 길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결단했는지 내 스스로도 의심스럽지만 그게 소위 부처님과의 인연이 아닐까?
그 다음날 저녁 무렵에 도착한 오대산은 내가 전생부터 살아왔던 곳처럼 그렇게 푸근하고 정다울 수가 없었다. 그 날로 나는 출가생활이 허락되어 행자생활을 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나는 내가 출가했음을 집에 알렸고 나를 찾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후 지금까지 별탈 없이 수도생활을 해왔다.
얼마전 부친이 돌아가셨으므로 부친의 49재를 내 손수 올려드렸는데 그때 자식으로서 못 다한 효도를 용서 빌었고, 그 제사에 온 가족이 참석했던 기억이 새롭다.
나의 초발심은 사실 그 반항으로 점철되었던 사춘기 시절 긴 어둠 속에서 갈고 닦아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