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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전쟁 그리고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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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도각 1991년 03월 109호
폭발점을 향해 치닫는 시한폭탄과 같은 페르시아만 사태가,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는 전 인류적 염려와 기대를 무산시키고 마침내 바그다드 밤하늘에 축제일의 불꽃놀이와도 같은 수많은 폭탄의 섬광이 물결치는 전면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우리는 전쟁이 결과하는 대량파괴와 참혹한 인명살상의 두려움을 인류역사의 행간에서 무수히 경험하였음에도 문제해결의 손쉬운 선택으로 또다시 전쟁에 의지하는 인간의 미숙한 지혜 앞에 속수무책 안타까운 심정일수밖에 없다.
이번 전쟁의 한 주체인 미국의 전쟁선언은 쿠웨이트를 무력 점령한 이라크를 축출하여 세계평화와 국가간의 정의로운 관계를 견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복합적 성격은 단순히 평화나 정의의 명분으로 치장하기엔 너무나 많은 은폐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평화와 정의라는 지고한 가치의 실현은 그 목적에 걸 맞는 방법과 실천을 통해서 완성되어야지 전쟁이라는 폭력을 통해서 이루겠다는 의도는 차라리 평화와 정의를 욕되게 할 뿐이다.
또한 미국이 선언한 전쟁명분은 미국 스스로가 저지른 여타의 침략행위-월남전 ·그라나다·파나마-에 대하여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의문을 버릴 수 없다. 오히려 미국이 주도한 이번 전쟁은 그들이 지금까지 행해왔던 침략적 속성에 비추어 결코 뚜렷한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가 성립된다면 강한 폭력을 행사하는 자만이 평화와 정의를 내세울 수 있다는 이율배반적 반평화 반정의의 태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쟁 명분의 허구를 인식하면서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미국의 속성자체가 그러하듯이 이번 전쟁의 의미를 제국주의 나라의 패권적 속성인 식‘민지 지배와 다국적 기업의 석유이익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미국의 패권적 이익추구는 이제 주체적 자각에 눈뜬 제 3세계 국가의 격렬한 반대와, 평화와 자유를 추구하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흐름 앞에 점차 소멸되어 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평화와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전쟁의 참화에서 우리 책임의 면죄부를 받아낼 수 없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고도로 발달된 대량파괴의 무기 체계에 의해 무참하게 부서진 바그다드 시가지와 어린아이의 주검을 껴안고 울부짖는 아낙의 비참한 상황을 목도하면서, 전쟁의 무모함과 무차별 파괴에 대하여 분노를 넘어선 어떤 절망을 갖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파괴와 살상만으로 전쟁의 결과가 끝나지 않으리라는 데 있다. 전쟁이 극한적 상황에 몰리면 화학무기와 원자무기가 사용될 것이고,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이 파괴된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출되는 방사능 동 전쟁의 참화는 전 인류적 재앙으로 발전할 소지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석유생산지를 배경으로 한 전쟁터에서 막대한 양의 원유가 방출되고 폭격에 의해 불붙은 원유의 연기는 심각한 상태의 환경오염을 일으켜 우리들의 평화로운 삶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 예후가 어쩌면 20세기문명이 기계화되고 무기화 된 폭력적 속성으로 스스로 거대한 파멸의 길로 들어선 총체적 사멸의 상정일 수도 있다는 절망감이라면 지나친 기우일까?
이제 이 무모한 전쟁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평화의 이름으로 우리들 평화로운 삶이 부서지고 정의의 이름으로 우리들 자유로운 삶이 억제 당하는 전쟁, 더욱이 강자의 국가 이기주의와 경제적 이익을 위한 전쟁임에야 더 말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제 우리 밝은 눈으로 다시 보자. 그리고 되돌아가자. 무한정 이익추구가 아닌 진정 이웃과 이웃이 나누며 함께 하는 자리로, 거대한 물질문명의 삭막함이 아닌 따스한 피가 흐르는 인간의 모습으로, 극단적 사고와 행동이 아닌 포용과 이해의 지혜로, 이념의 도그마에 의한 심판이 아닌 열렴과 자유의 만남으로, 폭력과 전쟁의 광기가 아닌 자제와 합리의 이성으로.
깊어 가는 겨울밤, 산사의 정적을 가르고 이름 모를 산새가 피 토하는 울음을 내지르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바그다드 시내에 무참히 쓰러진 주검을 슬퍼하는 소리며, 잠들어버린 인류의 양심을 일깨우는 외마디 외침이다. 참 평화, 참지·유를 갈구하는 목마름의 외침이며, 인생의 안일과 개인적 이기와 집단적 무지를 꾸짖는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