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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불교와 종파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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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혜묵 1991년 03월 109호
\"이렇게 여러 스님들의 해석은 모두 옳고 모두 그르다. 그 까닭은 불성이 그런 것이 아니며,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해석은 다 그르다.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의미는 다 옳다.\"(元曉 「涅槃宗要」)
\"일심(一心)의 근원은 있고 없고를 떠나 홀로 깨끗하다. 삼공(三空)의 바다는 진(眞)과 속(俗)을 융합하여 담담(湛然)하다. 담담히 돌을 융합했으되 하나는 아니며, 홀로 깨끗이 양변(兩邊)을 떠났으되 중간은 아니다. 중간도 아니면서 양변을 떠났기 때문에 있지 않은 법은 무(無)에 머물지 않고 없지 않은 모습은 유(有)에 머물지 않는다. 하나도 아니면서 둘을 융합했으므로 진이 아닌 사(事)는 아직 속이 되지 않았고, 속이 아닌 이(理)는 아직 진이 되지 않았다. 둘은 융합했으되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진과 속의 성품이 서지 않음이 없고, 더럽고 깨끗한 모습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양변을 떠났으되 중간이 아니므로 유무의 법은 작용하지 않음이 없고, 옳고 그름의 뜻은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따라서 파괴하지 않아도 파괴하지 않음이 없고, 세우지 않아도 세우지 않음도 없다. 가이 이(理)가 없는 지극한 이치며, 그렇지 않은 크게 그러한 것이라 할 만하다\"
(元曉 「金剛三昧經論」)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한,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지도 않은 것, 위의 글은 「열반종요」에서 불성을 논증하는 부분에서 인용한 것이다. 불성의 체(體)에 대한 각종의 해석을 그는 여섯 스님의 서로 다른 견해로 분류하고 소개한다.
하나의 불성을 놓고 상충하는 여러 가지 해석들. 그것들에 대한 원효스님의 결론이 바로 이 알쏭달쏭 아니 심오해 보이는 인용구이다. 원효스님은 이러한 신묘한 방법을 사용하여 백천 가지의 경론과 백만 가지의 논쟁들을 꿰뚫어 불법의 헌출한 체계로 묶어내었다. 이런 방법을 가리켜 사람들은 \'회통(會通)\'이라는 말로 부르며 저런 사상을 가리켜 화쟁(和爭)이라고 표현한다.
한국불교사를 장식하는 톱스타들 중의 톱스타인 원효, 한국사상의 최정상에 있는 화쟁사상(어떤 사람들은 聖師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그를 신격화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나는 그토록 성스러워야 하는 까닭을 모르겠다)인도, 중국, 한국은 잇는, 그리고 천년이 넘는 역사를 따라 헤아릴 수도 없이 명멸했던 온갖 부파와 종파들의 이론과 해석들을 일법(一法), 일미(一味)의 일승(一乘)으로 완결시켰다는 그의 교학, 사람들은 그와 같은 원효의 교학을 통불교라 부르며, 여타의 종파 불교에 우월한 어떤 것으로 쉽사리 단정짓는다. 그리고는 한국의 불교는 이러한 상대적으로 우수한 불교직 전통을 이어 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이 통불교적 전통이야말로 한국불교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손꼽게 된다.
통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다. 40년 간을 쉬임 없이 이곳저곳으로 다니시며 이런저런 의심과 고통을 가진 다양한 사람, 다양한 집단들을 향하여 숱한 방편과 교화를 행하셨다. 이러한 행적들이 각기 경전으로 결집되어 그 복잡하고 생생한 가르침의 현장을 재현하고 있으며, 또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며 후대의 중생들에게도 각각의 고민과 근기에 맞춰 지침과 표본이 되어왔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에 대한 중생들의 수용과 해석, 또한 실천이 늘 쉽고 일치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경전에도 한 회상에 모인 같은 대중 속에서도 방금 들은 가르침에 대해 근기에 따라 수용하는 바가 전혀 달랐다는 묘사들이 나온다.
게다가 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신 후, 역사적 상황이나 제자들의 관점, 근기의 변화, 또는 언어 ·문자 따위의 근본적 한계들이 복잡하게 얽혀 놓았으니, 여러 갈래의 상충하는 해석들이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그 해석들간에 심각한 충돌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계율해석을 둘러싼 이견으로부터 시작된 부파들의 분열 이래로 소승·대승의 분열은 물론이요, 인도·중국을 거치는 대승불교권에서도 성실종 ·비담종 ·율종 ·지론종 ·섭론종·삼론종·법화종·법상종·법성종·천태종·화엄종...등 헤아리기조차 힘든 종파들이 있어 왔다. 또한 불립문자·직지인심을 주창하는 선종에서조차 다섯 종파와 백가의 가풍으로 분분히 자신들의 영역을 누리며 지켜왔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오교구산이니 오교양종이니 하는 종파불교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굴곡을 지으며 발전해 왔다.
그런데 이제 원효성사께서 신묘한 방편을 들어 가히 백가쟁명의 종파불교를 하나로 회통하셨으니 과거의 종파운동을 주창했던 큰스님들이(한 종파의 창시자들) 모자랐던 것일까, 원효스님이 조계일학으로 당당히 뛰어났던 까닭일까.
종파불교는 그 종파가 시작했던 시대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 특수한 상황은 그에 따른 특수한 방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방대하고 다양한 가르침의 바다 속에서 하나의 시대가 요구하는 특수한 필요를 종파불교는 지향하고 있다. 종취(宗趣)라는 말이 그렇듯 그 방대한 가르침 속에서 병에 따라 약을 쓰는 것과도 같이 가장 긴요한 부분을 목표로 삼게 된다. 한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의 관심이나 고통을, 그러한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 개개인에게는 사실 부처님의 가르침 전체가 모조리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삼장 십이부의 가르침의 바다 속에서 욕정의 개인이나 집단에 필요한 가르침은 각자에게 맞는 한두 구절로 충분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르침을 관통하는 아름다운 일승(一乘), 일미(-味)의 체계가 아니라 그들의 고민, 고통을 해결하는 일이요 적절한 수행을 통한 삶의 실제적인 변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과 그 속에서의 실천을 놓고 벌어지는 이견과 다툼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고, 그러한 장애들을 극복해 가면서 가르침이 우리 속에서 실현 되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숱한 종파와 그들간에 벌어졌던 갈등과 다툼들은 그들이 안고 있던 진정한 고통들을 반영하고 있다. 앞서 인용한 「열반종요」의 여섯 가지 서로 다른 해
석은 ‘미래에 받을 불가(佛家)’, 중생 ·심성(心性) ·심신(心L神) ·아뢰야식의 종자·아마라식의 진여해성(眞如解性) 등으로 상충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들에 대해 원효스님은 인과(因果) ·진속(眞洛) ·인법(人法) ·기복(起代) ·종자(種子) ·상심(上心) 동의 대구로 단계별로 분석해낸 뒤 이를 통틀어 일심(一心)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유무(有無)와 진속(質洛)을 넘나드는 두번째 인용구는 보다 분명하게 회통의 근거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대구들을 교묘하고 회통하여 아우를 수 있는 ‘더럽되 더럽지 않고 더럽지 않되 더러운’ 일심(一心)은 그대로 「대숭기신론」의 논리를 활용한 것이다. 원효스님이 활용하는 회통의 신묘한 방법은 「기신론」이나 「금강삼매경」이 취향하는 일심을 기초로 하고있다. 이러한 일심에 기초하기 때문에 부정하지 않아도 부정되지 않음이 없고, 긍정해도 긍정하지 않음도 없는 화쟁의 논리가 성립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회통이나 화쟁조차 하나의 가르침을 종취하는 한도 내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종파불교는 가르침 전반에 대한 전체적인 조감(敎相判釋)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모든 종파불교가 이질적인 가르침을 체계화하여 하나로 회통함으로써만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종파불교는 이견과 논쟁들을 나름으로 묶어 주는 통로들을 모두 갖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원효스님이 「기신론」이나 「금강삼매경」(또는 다른 어떤 것이라 해도)의 일섬에 의존하는 것 또한 하나의 새로운 종파불교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화쟁의 논리 또한 그것이 출현하게 되었던 특정한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문화의 특성을 설명하는 오래된 비유 중에 ‘비빔밥 문화론’이라는 것이 있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지식인들이 이구동성으로 규정했던 비비기 좋아하는 한국인. 여기저기서 흘러 들어온 이질적인 요소들을 이러저리 뒤섞고 비벼 기존의 요소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독창적인 비빔밥 맛을 창조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그럴 듯하고 자랑스러운 듯싶은 ‘비빔밥 문화론’은 아전인수격의 검증될 수 없는 가치 판단을 담고 있다. 비비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비빔밥이 맛있는 것은 아니다. 비비고 뒤섞인 것을 찾자면 ‘꿀꿀이죽’도 있다. 꿀꿀이죽에서 맛은 연상하지 않듯이 한국문화에서 꿀꿀이죽을 연상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가진 선입견 탓일 것이다. 이 비빔밥 문화론의 불교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통불교’라는 이론이다. 이것은 이제 역사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정설 ·통설이 되어 비빔밥 이론의 중요한 부분, 강력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조계종의 종헌에도 명기되어 있듯이 한국불교는 통불교의 전통을 계승·지향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선
종을 표방하면서도 불교의 온갖 요소들을 모조리 그안에 아우르고 있다. 이것도 불교고 저것도 불교고, 선도 악도, 지계도 파계도, 정진도 방일도, 참선도 염불도 모두가 불교고, 모두가 불교가 아니고,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개 모두가 불교라면 새삼스레 불교라 간판을 걸 이유는 없을 것이요 불교가 아니라면 다시금 불교라 주장하는 것은 어떤 까닭인자 그리고 그와 같은 전통을 모두가 원효스님 같은 논리 ·사장을 취향하기 때문이기나 한 것인지, 통불교를 빙자한 ‘꿀꿀이죽’의 꼬라지는 아닌 것인지.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수십 개의 종파들이 현존한다. 그 종파들은 엄연히 다른 가르침, 다른 기준, 다른 체계들을 기초·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별다른 차이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동소이하다. 마치 불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이꽃들이 모양은 달라도 모두가 똑같은 종이로 만들어졌듯 다양한 종파들도 내건 종취에 상관없이 똑같은 기초를 갖고 있다. 각기 모양은 화사해도 향기가 없는 종이 조화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통불교도 종파불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종파도 진정한 우리 시대의 고통과 어려움을 향하고 있지 못하며, 그저 과거의 어떤 잔재만을 반추할 뿐이다. 진정한 종파불교가 없으니 진정한 회통도 있을 수 없고, 말로는 통불교를 부르짖어도 독특한 맛을 위한 일관된 비방 없이 온갖 가지 잡다한 요소들을 온통 뒤섞어 버무릴 뿐이다.
이제는 거창한 짓을 하는 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무 맛도 없는 퉁불교 타령은 집어치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