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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원결을 짓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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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관후 2001년 02월 228호
나라도 집도 지독히 못살던 시절, 할머니는 나를 혼자 절에 두고 가버렸다. 부모를 일찍 잃은 손자를 금이야 옥이야 키워 준 할머니였다. ‘할머님의 손자는 절에 팔아야 잘 될 것’이라는 주지 스님의 말 한마디가 내 할머니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 것이다. 공장에서 받아온 옹기를 머리에 이고 수십리를 걸어다니며 동네에 팔아 곡식과 바꾸어 우리 삼남매를 키운 할머니였으나, 절에 남아 있던 내 마음은 할머니가 원망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달도 없는 깊은 밤, 소변이라도 보려고 밖에 나오면 부엉이 우는 소리가 무서워 할머니를 원망했고, 바지에 오줌을 지려 스님께 혼나고 울면서도 할머니를 미워했다. ‘왜 나를 두고 갔단 말인가.’그 때 내 나이 여덟 살이었으니, 할머니의 깊은 심중을 헤아리긴 어려운 나이였다. 해서 가끔 절에 할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나타나면 ‘만날 필요 없다’며 숨어버렸다. 때로는 암자에서 하루 종일 보내다 설핏 해가 질 때쯤 본절로 내려오면,나처럼 크던 동자승들이 일러 주었다. ‘너희 할머니, 울다가 내려가셨다.’ 그런 날은 밤이 오래도록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었으나 할머니가 용서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그렇다. 종교를 믿고 불법을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부모님 살아 계실 제 어른들 가슴에 상처 주지 않는 효도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그걸 알았으니 후회해 봐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대를 이을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절에 놓고 간 할머닌들 얼마나 가슴이 아렸겠는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중에 동네 할머니들이 절에 올라와 전한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었다. ‘느이 할머니 죽을 때 손자가 보고 싶어 네 이름을 수십 번 부르다 눈을 감았다.’ 참회한들 이미 늦은 시간이었으며, 씻을 수 없는 죄였다. 또한 살아서 내가 지은 가장 깊은 원결怨結이었다. 예순이 훌쩍 넘은 지금도 할머니를 회상하면 눈물이 나올 뿐이다.
아무리 큰 서러움이나 고통도, 혹은 세상의 부귀영화도 물거품일 뿐이다. 지혜로운 이는 그러한 것들이 자신에게 왔을 때가 바로 공부할 시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할머니의 죽음 이후에 많은 것을 깨달았고, 또 할머니를 그렇게 보내드린 한 때문에 그로부터 지금까지 쉰 해 이상을 부처님 제자로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 때문인지 나는 세간 사람들에게 당부하곤 한다. ‘금생에 도통하려는 욕심을 내지 말라’고. 그리고 나는 한결같이 그들에게 말해왔다. ‘죄만 짓지 마라. 살아서 원결 짓지 마라.’ 그만큼 내 할머니에게 지었던 원결이 컸던 게다.
여덟 살 때부터 열일곱까지 갑사에서 보낸 내 행자시절은 아마도 지금 사람들이 하는 행자생활과 견주어 보면 먼 옛날 얘기로나 남을 그런 것들이다. 갑사에 나처럼 크던 동자승은 아홉 명이었다. 점심 한끼만 밥을 먹고 아침 저녁으론 죽을 쑤어먹던 시절, 우린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먹는 것에 늘 허기져 있었다. 죽을 퍼내고 난 솥에 묻어 있던 죽 찌꺼기를 서로 긁어먹으려고 주걱을 빼앗기 일쑤였다. ‘형 조금만 남겨줘…’라고 나이 어린 동생들이 애원하면 형들이 마지못해 넘겨주는 주걱을 받아 훑어먹고 빨아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곤 했다. 나라도 집도 가난했으니 절 살림 또한 넉넉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스님들의 언행이 참 꼿꼿했었다. 내가 시봉했던 노스님은 대처를 한 분이었으나 가사를 단정히 차려 입고 염불을 많이 했다. 어디 외출함 없이 늘 그림처럼 앉아 참선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던 것 같다.
또한 절에서 지켜야 할 법도도 엄격하게 익히곤 했다. 소포에 단단히 묶여 있는 끈을 가위나 낫으로 끊어버렸다간 불호령이 내려졌다. ‘그것 하나 풀 줄 모르면서 부처님께 절한다고 하느냐.’ 맺힌 것은 반드시 풀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그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익히고 배웠던 것이다. 국수 가닥 하나라도 쉬 버리지 못하도록 엄하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이러한 가르침은 꼭 어려웠던 살림살이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노스님들의 어린 후학들에 대한 애정 어린 가르침이 아니었겠는가.
아주 어려웠던 시절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었던 법도며 물질을 아낄 줄 알았던 옛날을 돌이켜보며 때로 나는 생각해 본다. 지금은 ‘탁발’이라는 것이 사라진 지 오래이나, 절집에 들어온 사람에게 탁발을 하게 하면 어떨까 한다. 탁발을 해보면 사중 물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으며, 아상을 버리고 하심하는 데는 탁발이 최고인 것이다. 물자가 흔한 요즘이라서 혹여라도 사중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잃을까 생각해 본 것인데, 이 노승의 생각이 요즘 사람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지 모르겠다. 기왓장이나 도량에 난 풀을 뽑고, 고추밭 매는 것이 모두 수행이건만 마당도 안 쓸려고 하는 후학들을 보면 부질없는 생각이 아니겠는가.
어린시절에 보낸 행자생활 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은 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계룡산 깊숙이 들어가 나무를 해다가, 장날이면 이삼십리 길을 걸어 장에 내다 파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었다. 스님네들도 나무를 해다 절집살림을 꾸렸기에 장날이면 아침부터 서둘러 길을 떠나곤 했다.
갑사 신흥암에서 한 스님과 둘이 살 때다. 장날만 되면 나는 산 속에 혼자 남아 무서움에 떨어야 했는데, 스님은 나뭇짐을 지고 나가면서 늘 ‘사탕 사다 줄게 집 잘 보고 있거라’했다. 혼자 있는 게 싫은 눈치가 역력한 내게 문구멍에 침을 발라 뚫어 주면서 ‘소 한 마리 들어올 거다. 잘 보고 있거라’하고는 바쁜 걸음을 떼었는데, 방 안에 혼자 앉아 있다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문구멍에 눈을 대곤 했으니 스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순수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 날은 하루가 어찌 그리도 긴지, 하루종일 무서움에 떨며 가만 있으면 저녁나절이 다 되어서야 스님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곤 곧 내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사람과 사람이 같이 기대어 사는 아름다운 의미를 그 때 어럼풋이 알지 않았을까.
나무 해다가 행자 하나에 배당된 세 아궁이에 불 때고 방청소에 빨래, 화롯불을 꺼뜨리지 않고 불 잘 담아 놓는 것을 착실히 했던 행자시절이었다. 시봉 잘해 스님들 기분 좋으면 염불을 배우고 초발심자경문을 익혔던 시절이었고, 할머니와 누이들이 그립고 미워 남몰래 울기도 많이 하며 중물을 들였던 시절이었다.
해방 전후 정화되기 전의 절집이었으니 노스님은 절에 상주하고 나머지 소임을 맡은 스님네들은 마을과 절을 오고 갔던 시절에 행자생활을 거의 십여년 하고, 신흥암 석봉 스님을 모시고 사미계를 받았다. 그 때 내 나이 열일곱, 지금 예순넷이니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 무엇할까. 기막히고 허망한 것이 어찌 세월의 무상함뿐이겠는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전, ‘무상함을 알고 끊임없이 정진하라’시던 유훈이 가슴에 사무칠 뿐이다.
도반도 상좌도 몇 없이 한평생을 살아왔다. 별로 내놓을 것도 없는 삶이었다. 때로는 ‘성불도 못하고 죄만 짓는구나’ 하는 회한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장경각이 내다보이는 이 곳에서 새벽에 일어나 백팔참회로 하루를 열며, ‘오늘도 하심하고 하루를 살겠습니다’ 하고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그 순간이 좋기에 부처님 제자 되기를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지닌 것에 만족할 수 있는 세월을 산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