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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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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정천구 1991년 03월 109호
믿음과 닦음
지금 돌이켜 보면 나의 불교신앙은 세 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 같다. 첫째 단계는 어린 시절 가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절에 다니면서, 그리고 이따금 집집마다 찾아오는 탁발승의 청아한 목탁소리 염불소리를 들으면서 막연히 동경하던 불심이 그 것이고, 둘째 단계는 정식으로 불교에 입문하여 불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여 경도 보고 법회에도 열심히 다니던 시절이다. 다음으로 그러한 불연들이 모아져서인지 어느 때 훌륭하신 선지식올 만날 기회가 있어서 확실한 불교수행의 방법을 가르침 받고 그대로 실천해보도록 노력하기 시작한 것이 세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억지로 이름 붙여 보자면 불교와 사귀는 단계를 시작으로 해서 불교에 대한 믿음의 단계에 들어와 닦음의 단계로 나아가는 그러한 발전과정을 지나온 것 같다.
동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백성욱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닦음의 방법은 「금강경」 독송이었다.
불교에는 참선, 염불! 독경 동 여러 가지 수행방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스승님께서는 아침 ·저녁 금강경을 독송하고, 평소에는 모든 사물이나 올라오는 마음에다 대고 “미륵존여래불”을 염송하라는 매우 간단하고 확실한 수행방법을 가르쳐 주셨다.「금강경」을 읽을 때는 금강경이 설해진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법문을 듣는 기분으로 반가부좌한 상태에서 허리는 자연스럽게 펴고 바르게 앉아 경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소리내어 읽되 끊이지 않고 면면히 흐르는 물소리처럼 그렇게 읽으면 된다.
그렇게 「금강경」을 읽어보니 첫째는 생활 속에서 쌓이기 마련인 마음의 찌꺼기들과 스트레스·근심 ·걱정들이 저절로 해소되고, 둘째는 기(氣)의 유통과 혈액순환이 잘 되어서 그런지 피부가 맑아지고 건강이 좋아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금강경」을 읽으면 정신과 육체가 가장 건강하고 밝으신 부처님을 향하게 되고, 경을 읽으면서 자연히 복식호홉·단전호홉이 이루어지니 읽는 사람의 정신과 육체가 건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금강경」독송은 생활건강법으로서도 더할 수 없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금강경」에는 “이 경의 뜻이 불가사의함으로 그 과보도 불가사의함을 알라\"116품)라는 말씀이 있듯이 우리의 경험이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많은 불가사의한 공덕이 있다고 하겠다. 「금강경」 독송을 통해서 불교를 믿는 효험을 생활 속에서 실증적으로 체험하게 되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더욱 깊어지고 불교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는 믿음에 의해 닦음으로 들어가고, 닦음을 통해 다시 믿음을 굳건히 하게 되는 것 같다.

삶의 지혜
「금강경」 독송은 이렇게 정신생활과 육체생활의 건강을 유지, 증진하는 비결이 될 뿐 아니라, 「금강경」
에서 설해지고 있는 법문들은 우리의 삶을 진실 되고 착하고 아름답게 영위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혜들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금강경」에 관한 해설은 그동안 형이상학적인 어려운 학문적 해석이나 선문답의 격외법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금강경」의 가르침이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의 생활태도에 어떤 교훈을 제시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덜했던 것 같다. 그러나 금강경은 어떤 초월적인 세계나 신비의 세계를 논하기 이전에 우선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가장 건강한 삶의 자세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 세상의 어떠한 난관도 뚫고 어떠한 유휴에도 빠지지 않을 수 있으며 하늘과 사람이 다 존경하는 귀중한 삶을 살 수 있는 그러한 삶의 지혜이기 때문에 이 경의 이름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한 것이다.
여기서 「금강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삶의 자세 중 서너 가지만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금강경은 대승의 정신을 삶의 기본자세로 제시하고 있다. 「금강경」제 3품 대승정종분에서는 보살·마
하살은 마음을 항복하는데 있어서 아홉 가지 중생을 모두 다 열반으로 인도하여 제도·구원하겠다는 큰 서완을 발하되 나라는 생각이나 사람이라는 생각이나 중생이라는 생각, 수자라는 생각을 내어서 중생을 구제했다는 생각이 남아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하였다. 불교공부를 하고 극락에 태어나기를 벌더라도 자기 혼자만 구원을 받는다든지 자기가 속한 집단만의 구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구원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일을 했다고 어떤 결과에 만족하여 머무르거나 티를 내면 그것은 보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우리의 생활 속에 실현하자면 우리에게 부딪혀 오는 모든 중생들을 남김없이 부처님께 인도하는 것이니 구체적으로 밸}면 마음 속에 중생으로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밖에 있는 중생으로서 경계 속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을 ‘부처님’하거나 보다 확실하게 ‘미륵존여래불’해서 부처님께 바치는 것이다.
보통 마음 속에 있는 우리의 생각은 원인으로서의 중생이라 하고 밖에 있는 사물들은 결과로서의 중생이라 고 부른다. 우리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마음에 넣어두는 생각들은 나중에 어느 때인가는 연을 만나서 과보를 받게 되는데,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에 넣어두면 어떤 계기가 되었을때 그와 4싸우게 되는 결과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하는 사람은 무슨 마음이 올라오든지 이를 얼른 부처님께 바치고 볼 일이다. 밖에 있는 중생은 과거에 넣어두었던 중생심이 모여서 결실을 맺은 것인데, 예를 들어 날짐승은 배은망덕하는 마음을 연습해서 그 결과로서 몸을 받은 중생이라고 한다. 9가지 중생 중에는 우리가 생물이라고 부르는 중생들 뿐만이 아니라, 생각이 있는 것이나 생각이 없는 것이나 다 포함되므로 무생물도 중생에 속하며, 정치 ·사회 ·경제 ·문화현상도 다 중생에 포함된다. 소승은 이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자기만의 구원을 추구하나 이 육신과 정신이 독립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보살은 나와 너, 중생을 구별하지 않고 안과 밖의 모든 중생들을 부처님께 바쳐서 열반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법다운 수행 긍정적 자세
그런데 이러한 공부도 법답게 해야 한다는 점을 「금강경」은 강조하고 있다. 13품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에 보면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러한 이름으로 받들어 지닐 지니라. 왜냐하면 금강반야바라밀이 곧 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바라밀이니라”고 하는 말씀이 나온다.
「금강경」은무상(無相)을 종으로 하고, 무주(無住)를 체로 삼는다는 육조 혜능대사의 말씀과 같이 「금강경」은 집착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는 마음이 진정한 머무름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러한 정신은 불교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며,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금강경」 자체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며 불법도 불법의 원리에 맞게 믿고 수행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강경」독송을 하는데 있어서도 「금강경」을 많이 읽겠다고 욕심을 내면 탑심이요 「금강경」이 안 읽어진다고 조바심을 내면 진심이며, 또는 「금강경」을 내가 잘 읽었다고 생각한다면 치심이다. 그러면 「금강경」 독송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욕심을 내는 대신에 원을 세우고, 조바심을 내는 대신에 그 조바심하는 마음을 부처님께 바치고 자만심에 머무는 대신에 더욱 발심해서 수행한다면 그것이 법다운 수행이라 할 것이다.
어떤 분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부처님 법을 위해서는 욕심도 내고 분심도 내어야 하며, 자기의 법을 남에게 자랑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으나 이는 「금강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불교인의 진정한 삶의 지혜와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법다운 수행이라 해서 「금강경」이 소극적인 생활자세를 권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금강경」은 무슨 일에서든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갖도록 가르치고 있다. 먼저 보살은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한다는 크나큰 원을 항상 세우는 까닭에 어떤 일에서 보살이 마음으로 세상일을 회피하는 일이 없다. 실재로 하고 안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판단되어질 일이겠으나 「금강경」의 가르침에 따르는 사람은 자기에게 부여된 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해결하려는 마음을 내게 된다. 또한 「금강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수행의 목표들이 모두 모든 중생심을 불심으로 바꾸고 이 국토를 장엄 불국토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금강경」은 항상 긍정적이고 밝은 마음을 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부정이 아니라 공정의 마음,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마음, 님에게 바라는 걸인의 마음이 아니라 남에게 베푸는 대인의 마음을 내는 생활자세를 「금강경」은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금강경」의 가르침들을 숙지하고 있으면 세상에 떠도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속에서 사람들의 욕심을 자연히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요즈음 과소비 추방운동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데 몇 가지 표어를 보니 부정적인 메시지에 머무른 표현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무분별한 과소비가 나라 살림 좀 먹는다’라는 표어를 보면, 과소비의 문제점은 잘 지적하고 있으나 부정적인 이미지 즉 나라 살림이 결단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과소비 자체보다도 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른 든다. 「금강경」의 정신으로 여과시키면 이러한 표어는 ‘과소비 추방하여 나라 살림 일으키자’라든가 ‘너도 나도 절약하여 나라 살림 일으키자’등의 긍정적인 메시지로 바꿀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어떤 종교는 자기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포교하고 있는데 이는 저주하는 마음의 발로임을 알 수 있다. 「금강경」에는 부처님이 전생에 인욕선인으로 계실 때 가리왕이라는 폭군이 인욕선인을 자르고 베고 했어도 성내는 마음과 원한심을 내지 않았다고 했으니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남을 저주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이를 축복의 마음으로 바꾸도록 원을 세운다. 노사관계에 있어서도 월급을 많이 달라느니 더 줄 수 없다느니 하는 문제로 기업이 끊임없이 분쟁을 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과학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부인하지 않으나 「금강경」의 가르침대로 노사가 각각 주는 마음, 베푸는 정신을 가지면 노사문제는 훨씬 더 해결이 쉬울 것이다.
이제까지 말한 것은 「금강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삶의 지혜 중 아주 적은 일부만을 밝힌 것에 불과하다. 금강경은 부처님의 지혜의 핵심을 쏟아 부은 결정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한 두번 원어서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경천이 아니다. 마음으로 읽고 업으로 소리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받드는 「금강경」 독송을 일상생활화하면서 거기서 날마다 새롭게 제시되는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생활 속에 실천해 나갈 때 비로소 「금강경」을 진실로 배우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