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담는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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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담는 오솔길 - 진명
2001년 02월 228호
눈 쌓인 어느 날 무척 오랜만에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해도 바뀌고 도심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의 안부 전화였지만 가느다란 전화선을 타고 들려 오는 목소리에는 흐르는 시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모처럼 옛날 물건들이 있는 거리에서 마음의 눈에 깃든 시간들을 확인하며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겨울 햇살이 하루의 주어진 역할을 마칠 즈음 좁지만 운치가 있는 뜰이 있고, 지나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바라볼 수 있는 찻집에서 차 한잔을 나누기로 했다. 사람 사이에 흐른 시간의 흔적은 그렇게 문득 한 생각에서 일어난 만남에서 확인을 하며 살아간다.
근 십 년을 보내며 지켜보는 동안 그 불자의 삶에서 많은 변화를 엿볼 수 있었다. 삶의 고뇌와 넘치는 감각을 견디느라 힘들게 보낸 삼십대를 지나서 이제는 자신의 본질세계를 향해 비본질적인 재주를 한 가지씩 가지치기하며 깊고 넓게 예술세계를 펼쳐가려는 사십대 중반을 살아가는 사람. 재물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아도 마음의 풍요를 화폭에 담을 수 있는 작은 재주에 감사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예민한 눈이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아는 사람, 불자로서 맑은 삶을 추구하고 낮은 자리에서 겸허함의 미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는 사람의 모습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 짧은 만남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얼마나 다양한 고뇌의 교차로를 지나야 삶의 번뇌가 다한 그저 존재함으로 충만함을 지니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와 책상 앞 좌복 위에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람의 만남에는 인연이 다하면 헤어진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고, 시간의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지만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서 자신과는 다른 삶을 체험하고 거울처럼 비추어 자기의 내면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저마다 추구하고 사는 삶의 빛깔에 따라서 만남의 빛깔과 향기도 분명 다르다. 문득 나는 오늘 만난 인연들에게 어떤 빛깔과 향기를 주었을까 부끄럽지 않은 기억으로 자리하길 바랄 뿐이다.
수행자는 간소하고 담박한 삶이 근본이 되어야 하고 번거로운 인연을 견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하루 마음을 나누고 지나간 사람들의 인연을 정리하고 살펴가야 한다. 곁가지를 잘라주며 더 실한 열매를 기대하며 정성을 다하여 땀흘리는 농부의 마음처럼 마음 농사에 정성을 쏟지 않는다면 무늬만 수행자라고 하지 않겠는가. 한적한 산이나 번거로운 도심을 따지며 입으로나 글로만 자신을 변장하고 사는 수행자가 아닌 자신에게 진정 부끄럽지 않은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의 크고 작은 고뇌의 교차로를 건너야 한다. 자연과 사람 물질과 사상……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내가 걸어가는 세월 앞에 늘 푸른 신호등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에게 냉정한 질서와 자기 성찰이 없이는 이름만으로 사는 수행자일 수밖에 없다.
아직도 처음 산문을 들어서던 날 만났던 솔 향기와 솔바람 소리를 기억한다.
산으로 향하던 날 첫 만남이라서인지 가슴 한 언저리에 깊숙이 묻어두고 힘들면 깃들어 보는 마음의 움막이 되어 있다. 아마 힘든 행자시절을 기억하며 어려움 인내할 수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다가가도 변함없는 향기를 가진 소나무처럼 세월에 두께가 더해 갈수록 마음 나누며 살아가는 인연들에게 깊은 수행자의 향기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람 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