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바위 불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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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여화 - 정영호
2001년 02월 228호
팔공산八公山 지역의 불적조사를 매듭짓기 위하여 1959년도 여름방학에 팔공산 남쪽 기슭의 동화사를 찾아갔다. 이 때 동화사 주지 스님은 배응연 스님이시고 신도회는 여呂회장님이 이끌고 있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도벌이 심하여 산에는 오래 된 나무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팔공산에도 골짜구니마다 무성했던 나무들이 어느 틈인지 모르게 도벌당하여 사찰의 경관은 물론이요 자연환경의 큰 훼손이 우려되었었다. 이 때 배응연 주지 스님은 도벌을 막고 도벌꾼들을 잡기 위하여 직접 진두지휘에 나섰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 스님들과 종무소 직원, 사찰관계자들을 배치 감시하였고 본인은 요소요소를 순시하였는데 그 결과 얼마 후에는 도벌이 근절되었다. 이 때의 상황을 각 신문에서 시사만화로 풍자하여 표현하였는데 승복차림에 군화를 신고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배주지 스님을 ‘산감’ 또는 ‘산림감독’ 스님이라고 칭하였으며 팔공산을 지키는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신도회의 여呂회장님은 대구 시내에서 「여씨약국」이라는 큰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경제적인 여유도 있고 특히 신심이 돈독한 불자로서 동화사의 여러 가지 어려움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으며 배주지 스님의 이러한 산림녹화 사업에 감탄하여 하루가 멀다하고 동화사를 찾아 주지 스님과 여러 가지 일을 의논하곤 하였다. 여呂회장은 후일에 대구에서 동화사 가는 오른쪽 길목에 이국적異國的인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운 여름철 동화사를 찾은 것이 저녁 무렵이었다. 밤에 주지실에서 앞으로 약 일주일간에 걸쳐 팔공산 곳곳의 불적을 조사하고 싶다는 필자의 제안에 주지 스님과 신도회장님은 물론 주위의 간부들도 찬성해 주었다. 다음날부터 팔공산 불적의 마무리조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현지 답사에 동참한 일행은 스님과 신도, 일반인 등 여러 사람이었는데 이곳저곳의 산골짝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석탑과 불상, 부도, 석등 등 많은 불교유적을 짧은 시간에 쉽게 조사할 수 있었다.
이 때 찾아내어 학계에 알려진 것으로 팔공산 상봉의 석불입상, 염불암의 마애불과 청석탑을 비롯하여 부도암의 마애불, 부인사의 유적, 파계사의 유적, 북지장사의 유적, 여러 골짜구니에서의 석탑과 석불, 석등, 갓바위의 석불좌상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서 대부분의 유적에 대해서는 일행들 사이의 한두 사람이 현지로 가는 길을 알거나 혹은 위치를 알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갓바위의 석불상’만은 소문은 듣고 있었으나 실제로 이 석불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고 그 위치조차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갓바위가 북지장사에서 가파른 산길을 여러시간 올라간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행은 그 위치가 동화사 동쪽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한낮의 더위를 피하여 오후 3시경에 여장을 정비하여 길을 나섰다.
동쪽의 낮은 산등성이를 넘어 약수터에서 목을 추기고 또한 고개 넘어 산기슭에 쓰러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부도를 조사한 뒤 다시 동쪽의 높은 산을 향하여 올라갔다. 8월의 삼복 무더위는 산속이 더욱 심한 것 같았다. 바람 한 점 없는 산길에서 무성한 잡초목에 몸이 긁혀 피가 나고 없는 길을 만들고 올라가자니 무척이나 힘든 강행군이었다. 겨우 산봉우리에 올랐으나 갓바위는 아니었고 험하게 솟은 바위만이 있을 뿐이었다. 해는 서산에 기울어 도저히 행군이 어려워져 우선 북지장사에 내려가 다음날 다시 시도하기로 하였다. 배응연 주지 스님은 북지장사의 위치를 잘 알고 있어 몇 개의 전등을 비춰가며 쉽게 내려갈 수 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북지장사의 노장스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데 갓바위는 여기서부터 동북쪽으로 가파른 능선을 따라 꽤 멀리 올라가야 한다는바 노장스님께서도 하도 험난하여 갔다온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하셨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길을 나섰다. 역시 가파른 능선이었고 길은 없었다. 이러저리 길을 만들며 산봉을 향하였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한나절 가까이 되어 봉우리에 갓을 쓴 석불 한 분을 멀리서 뵈올 수 있었다.
현재도 속칭 ‘갓바위’라고 일컫는 관봉冠峰을 목적으로 하여 북지장사北地藏寺에서 동북쪽으로 약 1시간 반 산봉우리를 향해 올라가면 전면全面이 화강암석인 관봉 주봉主峰에 다다른다. 북서쪽의 인봉印峰, 노적봉露積峰과 같이 험준한 이 관봉은 해발 850m의 높은 봉우리로서 눈밑에 여러 봉우리를 굽어볼수 있다. 이 정상에 전체높이 약4m의 좌불坐佛을 화강암 1석으로 원각圓刻하여 안치하였는데 사각형의 대좌도 동일석이고 신부身部의 의문衣紋이 좌대석 전면을 덮어 이른바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결가부좌한 불상의 두 손은 촉지항마인觸地降魔印을 결하였고 통견한 법의는 유려한 의문으로 두 팔을 거쳐 양 무릎을 덮었으며 가슴 앞에는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보인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머리는 삭발하였고 육계는 작은 편이다. 미간에 큼직한 백호가 있으며 미안眉眼이 수려하고 두볼이 풍미하여 굳게 다문 입술과 길게 늘어진 양쪽 귀는 근엄한 인상을 준다.
머리 위에는 두께 15m의 평박한 자연석 1매를 갓모양으로 다듬어서 육계 위에 올려 놓았는데 3판형瓣形이다. 한 면에는 원좌를 음각하여 육계와 맞게 하였으며 상면 중앙에는 같은 식의 원좌를 양각하고 그 주변에 화판花瓣을 조각하였으나 마멸이 극심하다. 아마도 ‘갓바위’라는 속명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것은 불상 조성 당초의 것이 아니며 불상과 석질은 같은데 그 조각수법이나 전체 균형 등으로 미루어 보아 후대後代에 올려놓은 듯하다.
상호의 수려함이나 동체의 균정된 아름다움에 비하여 하부의 옷주름이 섬약함을 느끼게 하나 각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신라 중기 이후의 우수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상호와 전체가 완전한 불상이나 오른쪽 무릎의 측면 일부가 떨어졌고 하부의 여러 곳에 약간의 균열이 보인다.
이 갓바위 불상은 필자에 의하여 학계에 알려진 뒤 ‘관봉석조여래좌상’이란 명칭으로 보물 제431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갓바위에 올라가는 길은 현재 북지장사에서 한 시간 반, 산 넘어 뒤쪽의 선본사禪本寺에서는 약 40분이 소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