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중생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죽비의 소리 - 관암
2001년 02월 228호
나는 어릴 때 동구 밖에서 벌어지는 개싸움을 많이 보았다. 영리한 개일수록 주인의 충복忠僕이 되어 상대가 어떤 놈이건 주인이 싸움을 시키면 거의 초죽음 상태까지 싸우게 된다. 특히 돈이 오가는 투견대회를 보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이 된다. 이런 물고 물리는 개싸움이 진흙 밭에서 일어남을 상상해 보라. 이런 것을 일러 이전투구泥田鬪狗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개가 아니고 사람이라면 그 어리석음과 비정함 그리고 꼴불견은 보는 이로 하여금 좋은 구경거리를 떠나서 측은하여 한숨짓게 할 것이다. 중생이 모여 사는 곳이 어딘들 온전하겠는가? 표현이 좀 심할지 모르지만 외국에서 보는 한국 사회의 여러 모습이 이전투구라 하겠다. 정치판이 그렇다보니 줄줄이 사탕처럼 경제계, 교육계 심지어 종교계까지 이전투구판이란다. 선진 외국 사회에 오래 살지 않더라도 객관적으로 한국 사회를 살펴보면 이런 표현에 이해가 간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지 모든 분야에서 문제가 어렵도록 곪아 터지게 “그것은 이제 정치논리로 풀어야 한다”라고 식자識者들이 이야기한다. 여기서 정치논리란 이것의 원래 뜻인 “서로를 인정하면서 진정한(투명한) 대화와 타협정신”이 아니라 권모나 술수 그리고 뒷거래로 풀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 그렇게 궁지에 몰린 일들을 풀어 왔다. 그러다 보니 이런 정치 논리적 해법에는 힘과 ‘빽’과 돈이 있어야 하고 모사와 공작이 있어야 했다. 이런 곳에 이전투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조계종단 또한 이런 일에 비켜가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조계종 반세기 동안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전투구는 나라의 부의 분배가 왜곡되고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높은 경제 성장률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서방의 경제학자들은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분배와 삶의 질이 우선되는 사회에서 두 자리 이상의 경제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천박한 자본주의로 인간의 탐욕을 극대화시키지 않고는, 그리고 일시적으로 어떤 이념으로 대중을 무장시켜 내몰지 않고는 두 자리 경제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인간의 욕망을 충동질하여 일을 위해 살고 돈을 위해 사는 식의 사회에서는 이전투구의 장은 마련된 셈이다. 개들의 싸움 뒤에는 조종하는 주인이 있기 마련이다. 개들이 죽자살자 싸움질하는 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된다. 그러면 우리 사회의 이전투구는 과연 누가 조종하고 있는가? 그리고 누구를 위한 충성심에서 그러한가?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이런 이전투구의 메커니즘 속에서만 자신의 금권을 유지할 수 있는 위정자들이 간접적인 주인일 수 있다. 그러나 근원적인 조종자는 각자가 지니고 있는 탐貪·진瞋·치痴 삼독三毒임에 틀림없다. 누군들 개처럼 싸우고 싶을까마는 사회 환경이 그렇고 삼독이 조종하니 이전투구장으로 내몰릴 수밖에….
지금 우리 한국 사회는 각 분야에서 매우 영리한 중생들이 파워를 형성해서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영리한 중생일수록 삼독의 충복인 셈이 된다. 새해엔 어떤 마음가짐으로 누구를 주인으로 모셔야 인간답게 사는 사회가 되겠는가! 영리한 중생들이 먼저 궁구하고 실천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