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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보다 더 높은 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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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동봉 2001년 01월 227호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관계로 아홉 살에 학교를 들어가 정규교육일랑 달랑 국민(초등)학교 사년이 전부인 나는 열세 살이 되던 1965년도부터 어쩔 수 없이 농사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어린 나이에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했으니….요즘 그런 말을 하면 아이들은 “그렇게 정 먹을 게 없었으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라곤 한다. 하여튼 너무나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나는 배고픔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체험했기에 요즘 도시락을 못 싸는 아이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그 처절한 아픔을 안다. 그러던 중 1968년 가을, 검정고시로 중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1969년 가을에는 고등학교 과정을 또한 검정고시로 이수한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갈망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다. 나는1971년 봄부터 사법고시에 도전, 만 삼년이 지난 1974년도 봄에 일차 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보기 좋게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그 때 받은 충격이 너무 컸던지 나는 공부하던 법률서적들을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지른 뒤 지금까지 이십칠년이 가까워오지만 단 한 번도 법률서적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공부만 할 수 있는 시간이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여명이 밝을 무렵이면 쇠죽을 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저녁 땅거미가 질 때 소먹이 꼴 짐을 지고 집안으로 들어오기까지 하루종일 농사일에 매달려야 했기 때문에 책을 읽고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이란 잠자는 시간을 얼마나 쪼개 쓰느냐가 전부였으니 천재가 아닌 이상에야 나 같은 둔재로서는 낙방을 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을 것이다. 더욱이 1974년 2월에 고향인 양평군 양동면 계정리를 떠나 충북 제천의 한 양잠농가에서 머슴살이를 했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인연은 묘한 것이라 했던가. 그 사시의 낙방이 결국은 나를 부처님과 연결시켜 주는 그런 계기가 되었다. 그 해 겨울, 제천에서 나는 한 탁발승을 만났다. 꽤나 세수가 지긋해 보였던 스님께 나는 합장을 하고 예의를 갖춘 채 물었다.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어떤 삶을 사는 게 가장 가치있는 삶일까요. 과연 이 세상에 자기를 바로 볼 수 있는 그런 학문은 있는 건가요? 스님.” 그러자 스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세상에는 많은 사짜 돌림들이 있지. 학사 석사 박사 교사 검사 판사 변호사 의사 목사 등등…하지만 그 모든 사짜 돌림 중에 뭐니뭐니 해도 가장 훌륭하고 가장 높은 건 아마 대사大師일걸세. 대사가 뭔지 알겠는가? 원효 대사 서산 대사 사명 대사처럼 큰스님들을 일컫는 말일세. 나고 죽음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스님네보다 더 이상 가치있는 일이 있을까? 그러니 자네도 한번 대사가 되어보지 않겠나?” 당시만 해도 일반인들은 스님네를 중, 아니면 대사로 부르기를 좋아했다. 중이라고 하면 거기에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대사라 할 때는 스님네를 약간 높여 부르는 것이기도 했으나 또한 조롱하는 뜻도 담겨 있었다.
따라서 ‘스님’ ‘큰스님’이란 호칭이 물론 예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일반화 된 것은 그리 오래 된 게 아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서너 달 뒤, 내 나이 스물세 살 되던 1975년 음력 2월 17일 나는 문득 강원도 치악산 구룡사로 들어갔고, 그 날로 머리를 깎았다. 비로소 행자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나의 행자생활은 별로 특이할 만한 게 없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밥 짓고 국 끓이고 반찬 만들고 땔나무하고 하는 일들은 모두 후원의 불자들이 알아서 했고, 나는 스님네 심부름에서부터 뒷간 청소, 도량의 풀 뽑기,농작물 가꾸기, 잣나무를 심고 가꾸는 그런 농사일이었다. 10년 동안 농사일로 잔뼈가 굵었는지라 그런 허드렛일들은 그리 어려운 게 없었다. 지금도 치악산 구룡사 도량내에는, 개울 건너 동락암까지 포함하여 삼십년생 가까운 수백여 그루의 잣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는데 다 그 때 내가 심고 가꾼 나무들이다. 세간에 살 때는 외모에 자신이 없었다. 난쟁이 똥자루만한 키에 별 볼일 없는 얼굴, 그래서 따르는 여자친구 하나 없었는데 삭발하고 부처님 제자가 되고 나서부터 외모에 약간 자신이 생겼다. 그런데 머리는 또한 어지간히 둔했다, 아마 지금도 전국에서 아둔한 머리 콘테스트를 연다면 대상은 틀림없이 내 차지일 것이다. 그런 머리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만 시간을 쪼개 공부하여 그 어려운 사법고시에 합격하기를 바랐으니 그 발상 자체가 아둔한 머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얘기겠지만 염불을 외는 것 또한 문제였다.

당시, 구룡사에는 나보다 서너 달 늦게 들어와 함께 생활하던 민 행자라고 하는 열댓 살 먹은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이미 밀양 표충사에서 일년 가까이 행자생활을 했던 사람이라 나보다 아는 게 많았고 민첩했다. 어느 날 주지 태허 스님 (현재 횡성 봉복사 주지)께서 우리에게 신중불공의 의식문인 신중청을 외도록 지시하셨다. 꽤나 많은 양이었는데 민 행자는 같이 일터에 나가서도 밭머리에 앉아 메모(그 때는 복사란 게 없었다) 한 신중청을 들여다보며 외고 있었고, 나는 종일토록 잣나무밭 풀 깎는 일에 매달렸다. 그가 얄밉기도 했지만 한편 부럽기도 했다. 우리는 사흘만에 주지 스님 앞에서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일 밤낮 없이 메모지를 보며 외었던 민 행자는 떨어졌는데 나는 그 긴 신중청을 어렵사리 다 외워 드디어 합격하였다. 주지 스님께서 내게 치하를 내린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주지실을 물러나온 뒤 민 행자가 말했다. “이 행자님, 불교란 의식문이나 잘 외는 데 있는 게 아니오. 팔만대장경을 위로 아래로 크로스로 아무리 줄줄 왼다 하더라도 실천이 따르지 않고 마음을 바로 보지 못하면 다 쓸데없는 것이오. 진짜 위대한 법사가 되고 선사가 되고 종사가 되고 대사가 되려면 참선을 잘 해야 됩니다.”그로부터 민 행자의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어쨌든 그 후 한 달 뒤 삼복더위가 시작될 무렵, 민 행자는 어디론가 떠나갔다. 나는 그 행자가 떠난 뒤 다시 한 달 남짓 있다가 구룡사를 떠나 해인사 용탑선원으로 자리를 옮겨 거기서 두 달 동안 행자생활을 더하고 행자생활 8개월만에 고암 큰스님을 은사로 하여 계를 받았다.
요즘도 나는 가끔 생각하곤 한다. ‘정말 대사가 모든 사짜 돌림 중 가장 훌륭하고 가장 높은가! 과연 그렇다면 나는 대사가 되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도 어느 정도나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