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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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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담는 오솔길 - 진명 2001년 01월 227호
어느 날 하루 종일 흐리더니 잔뜩 찌푸렸던 구름이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왔다. 겨울밤이 깊어가고 비는 무슨 심술인지 바람과 천둥까지 동반했다. 여름 천둥에 비하면 약하지만 겨울밤에 더구나 명상하는 시간에 듣는 천둥소리는 세상을 호령하는 느낌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과 중 하나가 명상시간을 갖는 것이다. 도심에 사는 나에게 그 시간은 하루 어떤 시간보다 감사하고 달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에는 밝아서 눈을 고요하게 뜰 수 없게 하는 전등보다는 나풀나풀 여린 바람에도 흔들리고 내 숨결에도 흔들리는 희미한 촛불을 켜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날 밤, 바람을 몰고 겨울비가 내리던 그날 밤은 창 틈으로 밀고 들어오는 바람이 촛불을 몹시 힘들게 했다. 그 좁은 틈바구니로 들어오는 바람결도 힘들어 이리저리 부대끼다 안간힘을 쓰며 다시 일어서곤 했다. 어느새 마음은 그 촛불에 가 있었고, 촛불이 흔들리면 따라서 흔들리는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내 그림자…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그림자를 하나씩 가지고 살아간다. 삼업으로 만들어가는 그림자 말이다. 말과 행동과 의지로 만들어가는 그림자는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일그러지는 촛불처럼 앞서 행하는 삼업의 형상을 따르는 것이 순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상을 따르는 그림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문득 촛불에서 그림자로 마음이 옮겨와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꼬리를 물고 참견하고 다닌다는 생각을 하니 혼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이 시간은 밖에서 노는 마음을 관해 보는 거다. 그것이 오늘의 주제다’라고 생각하며 내 그림자를 봤다. 그 동안 잊고 지냈던 내 그림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말로 행동으로 의지로 만들었던 내 그림자는 참 부끄러움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말보다는 버려야 할 말이 더 많았겠고 수행자다운 행동보다는 그렇지 못한 때가 더 많지 않았을까.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만들어가는 내 그림자가 부끄럽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니 문득 나에게 질감있고 깊이있는 그림자를 보여준 촛불이 고마웠다.

사람은 누군가의 굽은 그림자를 보고 쉽게 굽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그림자의 휘어지고 비뚤어진 모습은 잘 보지 못한다. 자기 편견에 사로잡혀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 이름 석자 휘날리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편견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서 머리 숙여 존경하고 마음을 낮추고 그들을 받드는데 익숙해져서 누군가가 자기 앞에서 자기 이름 석자를 몰라주면 상당히 불쾌지수를 높이고 몰라준 그 상대방은 그 자리에서 무식한 사람이 된다. 그 이름 석자에 가린 어리석음 때문에 낮은 자리가 얼마나 안전하고 마음을 낮추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가르쳐 주는 선지식을 몰라보는 자신의 눈은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아집과 편견, 교만이 만들어가는 자신의 굽은 그림자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선지식이라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겨울밤은 깊어가고 여전히 창 밖에는 겨울비가 내린다. 바람도 스산하게 스쳐간다.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온 몸으로 운다. 겨울비, 바람, 때 아닌 천둥, 촛불, 그림자…… 모두가 선지식이다. 꾸밈없는 모습과 자기만의 소리로 세상에 어우러져 있는 물상들이다. 세상의 모든 그림자를 거두어 마음 안으로 돌아와 하나의 그림자를 만들어간다. 아집과 편견, 교만의 옷을 벗은 왜곡되지 않은 수행자의 곧은 그림자가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내일 아침은 비가 아닌 함박눈이 펑펑 왔으면 하는 바람은 나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