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오전 작업을 마치고 오후가 되어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거북바우를 찾았다.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넘어가는데 멀리 산기슭에 시커먼 돌 하나가 보였다. 주변에 석재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어떠한 시설물이었음이 분명한데 가까이 가보니 귀갑문이 없고 비좌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나의 눈치만을 보고 있는데 이 거북바우의 주변 잡초를 제거하는 순간 너무나 놀라운 광경에 탄성을 질렀다. 그것은 반가상에서만 볼 수 있는 오른쪽 측면의 허리띠와 구슬 문양이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세밀히 살펴보니 상반신을 잃은 반가사유상이 앞으로 엎어져 있는 것이었다. 일행에게 부탁하여 삽과 괭이, 밧줄 등을 가져와서 뒤편 땅을 넓고 깊게 판 뒤 허리 부분에 밧줄을 걸어 힘껏 잡아당겼다. 두 번 정도 시도하니 큼직한 거북바우는 움직였고 마침내 뒤쪽으로 비스듬히 내려져 바로 서면서 전모를 들어내게 되었다. 흙투성이의 손을 털고 반가상 앞에 무릎을 꿇어 얼마나 많은 큰절을 하였는지 모른다. 봉화북지리석조반가사유상奉化北枝里 石造半跏思惟像은 이렇게 하여 발견 조사된 것이다. 동리사람들은 거북바우가 아니고 이게 무엇이냐고 의아해 하길래 현장에서 소상히 설명을 하였다. 이 반가상의 발견 지점은 북지 2리 수월암에서 남쪽으로 1Km쯤 되는 곳이다. 즉 이 장소는 구산동龜山洞이라 하여 속칭 「소북골거리」인데 민가는 없고 낮은 언덕이 연속되어 있다. 이 언덕과 평지가 접하는 대지 위에 민묘 2기가 있고 민묘 바로 남쪽에 거북바우라 칭하던 석조반가상이 쓰러져 있었다.
이 석상의 상반신은 복부腹部 위에서 잘려나가 없고 반가형半跏形의 하반신과 밑면이 구형矩形에 가까운 대좌가 화강암 1석으로 만들어졌는데 하반신만이 남아 있다. 처음 이 석상을 반가상으로 짐작한 것은 좌·우로 드리워진 유환비대有環帶의 조각과 뒷면에서의 요대腰帶 아래에 좌·우 사선斜線의 의습문衣褶紋이 있는 점, 대좌 상단에 단판 망련대와 그 밑으로 종선문이 조각되어 있는 점 때문이다.
앞면은 오랫동안 쓰려져 있으면서 흙 속에 있었던 관계로 검은색의 뒷면과는 대조적이나 당시의 양식을 따라 앞면 위주의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뒷면의 원곡면圓曲面에 비하여 늘어진 의문에서 앞면의 평면성을 느낄 수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반가석상과 같다고 하겠다. 반가된 오른쪽 무릎에서 다리 쪽으로 흐르는 선은 힘있게 원각 되었는데 발은 앞쪽이 잘려져서 발가락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팔도 무릎 끝에서 둥그런 접촉점을 남기고 있을 뿐 왼쪽 팔도 잘려 나가고 없다.
다만 오른발 가까이에서 오므린 왼손과 다섯 손가락이 완전하게 남아 있어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왼쪽 다리는 밑으로 내려졌으나 발은 없다. 그런데 이 왼쪽발은 별석別石으로 만들어 끼웠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왼쪽 다리 끝의 밑면에 15cm 직경의 원공圓孔이 파여져있기 때문이다. 이 석상의 대좌는 앞면에 가득히 내려져서 중첩된 의문을 조식하였다. 그리고 의문 옆에 화려한 영락대瓔珞帶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 다른 예例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점인데 모든 장식이 사실적이며 우수한 조각 기법을 보이고 있다
석상의 하반신과 대좌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높이가 1m에 달하는 대좌 위에 배면背面에서 무릎 끝까지가 1m나 되는 거대한 하반신이 안치되었고 대좌의 너비인 90cm에 비하여 잘려나간 허리 부분의 너비가 40cm인 점에서 신부身部는 세장細長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 석상의 크기는 현재 높이가 1.6m로 복원치는 약 2.5m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크기에서는 현재 남아 있는 반가석상 중에서 가장 큰 석상이라고 하겠으며 이처럼 거대한 원형석상圓形石像은 인도나 중국, 일본 등의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을 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석상은 법당 내에 봉안되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석상 부근의 지표를 보면 민표 주변에 초석형 석재 2개가 동·서로 남아 있고 또 주변 일대에 상대의 평기와 조각들이 산란한 점 등을 보아 틀림없을 것 같다.
이 석상은 1966년 1월에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당시 옮겨 모시는 작업 중 반가상에서 남쪽으로 200m 거리의 조그만 수로水路에서 연화문이 새겨진 원형석조물을 발견하였다. 이 석물은 몇 년 전에 반가상 앞에 있던 것을 수로의 다리로 쓰기 위하여 옮겨 놓은 것으로서 지금은 반가상과 함께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현지 주민들의 증언과 반가석상과의 비교에서 이 연화대석이 사유상의 족좌足座임에 틀림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연화대좌의 외연外緣은 옆으로 약간 벌어진 원형으로서 크기는 70×76cm이다. 그리고 발바닥이 닿는 자방子房부분은 길이 36cm, 너비 34cm의 둥근 홈이 파여져 있다. 이 홈의 둘레에는 앞면은 크고 뒤쪽으로 가면서 점점 작아지는 7개의 연판이 새겨져 있다. 발바닥이 닿는 자방의 중심점이 연화족파의 외연의 중심보다 뒤로 가 있으며 홈의 깊이도 앞보다 뒤쪽이 얕다. 이 자방부의 홈에다 발부분을 별석으로 조성하여 끼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석조반가사유상은 봉화북지리석조반가사유상이라 칭하여 보물 제 997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