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이혜경 1997년 03월 181호
글 이혜경 . 사진 주명덕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무렵, 남쪽으로 갈수록 대밭이 잦게 눈에 띈다. 죽은 듯 헐벗은 나무줄기들이 애처로운 겨울 산등성이에도, 인가 뒷 담자락에도 청정하게 솟구친 대나무들이 수풀을 이루고 댓잎은 소슬하게 반쩍인다.
이 땅 어딘들 가만히 귀기울이면 이야기 깃들이지 않은 곳이 었으랴만, 경주 또한 골골이 옛이야기가 되살아나는 곳이다. 산자들이 몸부대끼며 살아가는 터전이 죽은이들의 집 고분과 뒤섞여 있고, 길가에서 만나는 돌부처며 연못이며 수풀 어디에고, 이야기 한 자락 쯤은 담겨있다.
경주의 대나무들도 마찬가지다. 신라 14대 유례왕 때, 적군이 쳐들어오자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원병들이 나타나 적을 무찔렀다. 그 대나무 잎의 행방을 살펴보니 13대 미추왕릉 앞에 대니무잎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미추왕릉을 죽릉 또는 죽장릉으로 불렀다한다. 또다른 이야기 하나.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는 31대 신문왕 때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든, 바닷속에 떠었던 산의 대나무.
군데군데 보이는 대밭에 눈을 주며 경주 시내에서 토함산 북동산 자락을 타고 추령고개를 넘으면 길은 동해로 이어진다. 저수지와 골짜기, 내와 나란한 들판으로 오밀조밀 아름답다고 소문났던 그 길은, 터널을 뚫으며 내는 도로공사로 우뚝 솟은 시멘트 교각이 눈을 턱 가로막는 길이 되어 었다. 그 굽이를 지나 길과 나란히 이어지는 대종천 마른내를 끼고 동해바다 가까이에 이르면 벌판길 왼편, 평지보다 조금 높게 돋운 땅에 나란히 솟은 두 기의 탑이, 그 탑근처에서 고물거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간절한 호국의지가 서린 곳. 경북 월성군 용당면 용당산 기슭에 자리잡은 사적 제31호 감은사터이다.

감은사는 능침사陸寢寺 같은 구실을 했던 절이다. 삼국을 통일한 뒤 당나라까지 물리친 문무왕 때, 신라의 골칫거리는 뱃길을 타고 침범하는 왜구들이었다. 문무왕은 뱃길이 훤히 보이는 곳에 터를 잡고 불법의 힘을 빌려 왜구를 물리치려는 의도에서 감은사를 짓다가 세상을 떳다. 그 뒤를 이은 신문왕 2년, 감은사는 완공되었다. 원래 문무왕이 지어두었던 이름은 진국사鎭圍寺였으나, 부왕이 이룬 삼국통일의 위업과 호국정신에 감사하는 뜻으로 신문왕은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생전에 문무왕이 지의 법사에게 늘 말한 것으로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숭봉해서 나라를 수호하려 하오.”
이에 지의 법사가 대답한다. “용은 짐승의 응보인데 어찌 용이 되신단 밀입니까? 왕이 말한다.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가 오래 되오. 만일 추한 응보로 내가 짐승이 된다면 이야말로 내 뜻에 맞는 것이오.”
죽어서라도 나리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의지는 불교적 세계관과 어우러져, 문무왕은 신라땅에 능을 남기지 않는다.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일뿐이며 인력을 수고롭게 할 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지낼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유골은 불태워져, 감은사에서 내다보이는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대왕암에 뿌려졌다. 절을 지을 때, 신문왕은 절에서 바다와 통할 수 있는 용혈이라는 길을 내고, 절 바로 아래 용담이라는 연못을 파고 부처님을 모신 금당 밑을 비워 놓았다. 대왕암에 머물며 동해를 지키는 문무왕의 화신용이 지쳤을 때 물길을 타고 들어와 금당에서 쉬라는 극진한 마음이었다.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어, 1950년대까지만 해도 금당 바로 옆에까지 인가가 들어섰던 감은사터가 발굴된 것은 1959년의 일이다. 그 결과, 금당을 가운데 두고 절터를 빙 둘러 회량 주춧돌이 발견되었다. 산쪽으로 강당이 있고 가운데에 금당이, 맨 앞에 문지門址가 있는데 회량은 이를 가로왈日자 형으로 잇는다. 한면은 벽이고 다른 한면은 트인 채 기둥들만 나란한 회량, 소실점을 향해 나아가듯, 원근법의 정확한 비례에 따라 멀어지는 기둥들을 따라 걷다보면 직각으로 꺾어진 모퉁이가 나오고, 다시 걷다 보면 직각으로 꺾어진 모퉁이가 이어지는 사유의 공간, 이와 같은 회량형식은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다.
그 회량 안쪽에 동탑과 서탑이 나란하다. 삼 층으로 된 감은사탑은 현재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탑으로는 가장 큰 탑이다. 탑신부가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 석재로 조립되었고 탑꼭대기에는 쇠로 된 찰주가 하늘을 찌를듯이 날카롭다. 든든한 지대석에서 하늘로 치솟은 찰주까지 이어진 탑에서는 하늘과 땅을 잇는 씩씩한 기상이 느껴지나, 이 기운이 사람을 누르지는 않는다. 하늘을 지향하되 땅에 굳건히 발 붙인 탑의 담박한 겉모습은 얼핏 친근하게 다가가게 만든다. 그러나 막상 다가서면 쉽게 곁을 주지 않는 위엄이 느껴진다. 1959년에 서탑을 해체 복원하던 중에 사리구가 발견되었고, 1988년 4월, 동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부처님 진신사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 사리는 경주 나원리탑에서 발견된 사리와 함께 조계사에 이운되어 친견 법회를 가진 뒤에 다시 재봉안되었다. 사리를 문화재로 여져 박물관에 전시, 여러 사람에게 생각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으나, 전통적인 봉판식을 거쳐 원래 모셨던 자리에 재봉안한다는 것은 사리를 순수한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매김 했다는 또 다른 의의를 지닌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은 그저 묵연히 서 있다. 감은사터가 옛 절터 치고 스산함이 덜한 것은, 경주에서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지 않아서 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는, 빈터에 묵묵하게 서 있는 탑이 범종소리처럼 정중한 울림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기 때문일 것이다. 일천삼백여 년 전에 세워진 탑 곁에서 고작 백 년이 채 못 되는사람의 한생을 견주면, 소가 눈 한번 깜짝이는 동안이 한생이라는 초맹이라는 곤충과 사람이 다를 바 없음을 우뚝한 탑, 국보 112호가 말없이 가르친다. 그런데도 그 짧은 인생의 부피가 허허로움으로만 다가오는 게 아니라 그득한 의지로 혜쳐나가야 할 무엇으로 여겨지는 것은 감은사탑의 위엄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절터 어귀, 무슨 원을 담았는지, 한지 몇 가닥을 넣고 꼬은 새끼줄을 둥치에 친친 동여맨 느티나무를 지난 산자락에 인가 몇 채가 흩어져 있다. 비비대는 새소리 갈피로 뒤섞이는 독경 소리는 그 산자락에서 번져나온다. 바다를 좀더 잘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오르는 좁다란 산길, 삽으로 길섶을 깎아내리며 길을 넓히는 노인을 만나 저 위에 절이 있는지 묻는다. 절은 왜 찾아요? 절 없어요. 테이프를 틀어 놓은 듯한 독경소리를 쫓아 그래도 산길을 오른다. 음료수 패트병 자른 것으로 등갓을 만들어 죽 이어 놓은 전선을 따라가니 나무로 지은 오두막이 나오고, 독경소리는 거기서 흘러나온다. 조금 뒤, 뒤따라오던 이가 또다시 노인에게 묻는 소리가 들 린다. 저 위에 절이 있나요? 묵묵히 길을 넓히던 노인의 대답이 아래에서 울려온다. 절은 왜 찾아? 산 찾고 절 찾는 사람들이야 말로 일없는 사람들어지. 일없다, 한생에서 가장 바쁜 일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일없다는 말을 곱씹으며 오른 산, 그 산등성이에서 보면 저만큼 앞에 보이는 산자락, 포크레인이 빨갛게 파헤쳐 놓은 산 곁으로 열린 시야 바다가 보인다. 거기, 문무왕의 재가 뿌려진 대왕암이 있다.
대왕암을 잘 바라볼 수 있는 바닷가 정자가 이견대利見臺다. ‘주역’의 괘효 설명 가운데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봄이 이롭다(飛龍在天 利見大人)’ 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곳은 문무왕의 회신으로 여겨지는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이기도 하고,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은 곳이라고도 전해진다.
‘동해안의 작은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한다’ 는 말에 신문왕은 일관에게 점을 치게 한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진호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 공도 33천의 한 이들로서 지금 인간세계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이 덕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려 하십니다.” 왕이 사자를 보내어 살피니 물 위에 떠서 왔다갔다하는 산 위에 한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하여 하나로 되곤 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가 보니 용이 검정 옥띠를 가져와 바치며 대가 갈라지고 맞붙은 연유를 설명한다. ‘지금 선대 임금께서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시고 유산도 다시 천신이 되어 두 분 성인의 마음이 합하매 이같이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 나를 시켜 바치는 것이외다. 왕이 이 대를 가져다가 젓대를 만들어 부시면 천하가 태평할 것입니다.” 이 대나무로 만든 피리가 만파식적이다. 나라의 보물로 여겨 간직했다가 뒷날 없어졌던 신적을, 적에게 잡혀갔던 화랑유례량이 기도의 영험으로 가지고 와서 이름을 “수 없는 거센 물결을 자게 하는 젓대”라는 뜻으로, 만파식적이라 고쳐 붙어기도 했다.
경주 시내에서 대왕암이 있는동해 바다로 흘러드는 내, 지금은 말라붙은 대종천 또한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를 담고 흐르던 내이다. 신라시대, 호국사찰이었던 황룡사에는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 신종보다 네 배가 넘는 대종이 있었다.

고려를 침범한 몽고군은 이 대종을 그들의 나라로 실어가려 했다. 뱃길을 이용해 대종을 실어내려 대종천에 배를 띄우자, 갑자기 큰폭풍이 일어 종을 실은 배가 침몰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감은사 대종 또한 대종천 바닥에 가라앉았다고 전한다. 임진왜란때 왜병들어 감은사 대종을 훔쳐 배에 실어 일본으로 가려다 갑자기 천둥과 풍파가 일어 피선, 문무대왕 수중릉 근처에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큰 종이 빠진 곳이라서 대종천大鐘川이라는 이름이 붙였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간절함이 도가니에 횟물로 끓여 만들어진 종이 바로 그 나리를 침범한 적들에 의해 옮겨지는 걸 부처도 문무왕의 화신인 용도 종 스스로도 용납하지 않았으리라는 믿음이 그런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게 했을 것이다.

스스로 물에 몸을 빠뜨려서라도 이 나라에 머물려했던 대종, 죽은 뒤에라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임금의 비원과 신하의 의지가 아름답게 맞붙어 세상살이의 온갖 시름을 잠재웠다는 만파식적, 그들어 지키려던 궁극은 왕권과 더불어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의 자존과 안녕한 나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뒷날, 왕족들의 권력 다툼과 호족들의 성장, 무리한 조세 독촉에 반발한 농민들의 반란으로 그 세력이 약화된다.
왕권이 땅에 떨어졌던 48대 경문왕 때, 경주 월성 도림사의 대밭은 귀가 긴 경문왕의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복두장이가 시쳇말로 ‘국가원수 모독화’ 내지는 ‘국가기밀 누설죄’ 를 범한 장소이기도 하다. 평생 담고 있던 비밀을 끝내 견디지 못한 복두장이는 대밭에 들어가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고 토로하고 말았다. 이 말을 받아안은 대밭은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님 귀는 나귀 귀와 같다”고 수런거렸고, 소문을 못이긴 경문왕은 마침내 대를 베어 버리고 거기에 산수유를 심었다. 대나무가 산수유로 비뀐 뒤, 바람이 불면 산수유밭에선 “우리 임금의 귀는 길다”는 수런거림이 일었다. 제 생명을 보존하려는, 그러나 사실을 호도할 수는 없었던 산수유의 안쓰러운 자구책이었으리라. 그처럼 면면히 살아남아 천년 고도를 밟는 사람들에게 지금, 경주의 대밭은 무슨 말을 전하려 저리 수런거리는지.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