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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정사 정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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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7년 03월 181호
살아 있는 것들은 깨어서 움직이는 시간과, 그 움직임 모두 멈추고 쉬는 시간을 쉼없이 되풀이한다.
사람에게는 아침이 있고, 한겨울 동안 죽은 듯해 보이던 땅에는 봄이 있다. 언 땅을 뒤덮고 있던 눈이 뿌리를 적시어 초목을 생장시킬 물로 바뀌는 절기를 우수라 하니, 이 때에 이르러 천지는 겨울잠 끝내고 도처에서 움직임의 기미를 보인다. 그것이 부산 구덕산 동쪽자락에 자리잡은 내원정사 언저리에 한할 뿐이겠는가.
이미 남녘의 해바른 둔덕에서는 쑥이 속잎을 틔우고 있었다. 올해로 세수 쉰일곱, 승랍이 마흔둘인 정년스님은 오전 불식 중이었다. 맑은 차 한 잔놓고 마주한 스님의 얼굴은 역경과는 아무 인연이 없었던 것처럼 양명하고도 푸근하였다. 이십오 년 전 내원정시를 창건하여 부산에서는 범어사 다음으로 규묘가 큰 도량으로 일구어 놓은 정년스님.
법당 불사가 끝난 뒤인 85년에 개원한 내원정사 유치원은 겉보기로나 질로나 부산에서 가장 으뜸가는 유치원으로 손꼽히고 있고, 지난 연말에는 사하구 다대동의 몰운대 종합사회복지관을 운영하는 일까지 시작했다. 그가 오늘에 이르른 것은 부처님의 가피도 가피려니와, 무슨 일을 벌여도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스님이 뜻을 세우게 해 주었던 신도들 덕분이라 하였다.
그것이 거저 얻은 일이었겠는가. 무엇보다 스님의 뜻한 바 무엇에도 거침이 없었던 굳건한 원력이 씨앗이 되었을 터였고,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까지의 노고와 적극성과 인내심이 밭이 되었을 터였다.

구덕산 지락, 산 밑 동아대학교까지 십 분좀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원각사에서 서른이 다 된 스님 한 사람이 객승 노릇을 하고 있었다.
출가본사인 당감동의 선암사에서는 통학하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군대까지 다녀온 뒤의 만학이었다. 대중의 수효가 마흔에 이르고, 수좌들의 선방지키는 자세 또한 육중하여 가람의 무게를 더해 주던 그 곳에서 책을 펴 볼 엄두를 일찍 내지 못했다. 중학교에 들어놓고도 조금만 움직여도 숨어 차서 십 리 통학길을 포기하고 만 아들의 병을 낫우려고, 없는 살림 거덜내려 들었던 부모님을 두고 보지 못하여 문득 한밤중에 기차를 타고 부산의 선암사로 스며 든 것이 나이 열여섯일 때였다. 그러나 깍듯한 율사인 석암 은사 스님의 눈을 피하여 창문을 담요로 가리고 책을 읽은 뒤에 동아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했다. 이제 그 과정도 거의 끝나서, 일본으로 건너가 구모도 대학에서 은사스님의 뒤를 이어 율을 공부할 작정이었다. 기숙할 방도 얻어두었다. 그러나 사학년 이학기이던 72년 가을에 큰물이 져서 인근 저수지의 둑이 터졌다. 여든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 큰물은 원각사를 흔적도 없이 떠내려 보내고 한 스님의 삶의 길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대처승이던 주지가 보상금을 받아 권솔해 떠나자 졸지에 기도처를 잃게 된 열디섯 노보살들이 스님을 붙들었다. 지금은 수원지 옆으로 번듯한 길이 뚫려 절 양까지 한달음에 내닫게 되었지만, 절을 짓기 시작한 이십오년 전에는 울창한 송림 사이로 오솔길이 호젓하였고, 인가도 여섯 채쯤밖에 없던 곳이었다. 막 산림법이 강화될 즈음이라 절 부지로 사들인 일천 평이 나무가 자라는 곳이라고 허가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어 나뭇가지 하나 다치지 않고, 소나무를 일일이 옮겨 심었으니, 그 일이 산을 오르내리던 마을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널리 퍼지면서 그 스님 참 용타, 할 만큼 되었다. 서슬 푸르던 관에서도 빗장을 풀었을 뿐 아니라, 산림보호 표창장까지 내려 주었다.
지금 해인사의 율원장인 종진스님과 함께 소나무 밑을 법당 삼아 법회를 보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노보살들이 손수 쌀, 고추장, 된장, 연탄 따위를 지고 올라와 절 살림살이를 대는 가운데 그 성심에 감격하여 공사를 지휘하는 임시 숙소도 마련하지 않고 텐트 속 침낭 생활을 칠 년 동안 했다. 요사채부터 시작된 불사가 속도를 더하게 된 것은 석암스님이 지니고 계시던 진신사리를 내원정사에 모시기로 결정한 뒤부터였다. 전란 가운데 일본에서 발견된 이 진신사리는 일본 학계의 고증을 거친 것으로서 인연을 따라 봉선사 등과 나누어 안장케 되었던 것이다. 기초도 어치간히 마련된 터라 선암사에서 삼십 년 동안 주석하셨던 은사스님도 모셔 와서 칠 년에 걸쳐 “진신사리 모시기 불사” 기도를 올렸다.
내원정사의 법당은, 이제 와서는 그런 규모가 흔치 않게 되었지만, 당시만해도 정화 뒤 최대 규모였다고 정년스님은 말했다. 사리는 법주사 팔상전을 l/50로 축소하여 법당 한가운데 앉힌 탑 안에 보장되었다.
법당 안 한가운데 탑을 모선 것은 이 곳이 나라 안 유일한 경우인데, 이는 불상이 절에서 법회를 하게되면서 차츰 뒤로 물러가게 되었지만,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면 제자들이 빙 둘러앉아 듣던 원래의 형식을 되찾아주는 의미를 띤다고 했다. 법당의 세 면 또한 높이 열한 자쯤의 개금 목각 탱화로 조성하여 탑을 장엄하게 했다.
82년도에 올려진, 십 년 불사를 일단락하는 법당의 낙성식에는 전국의 큰스님들어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여 성만을 축하해 주었다. 조사당 두 채와 입구의 종루 밑 만불전이 아직도 불사중이지만, 이제 이걸로 불사는 고만이라고 정년스님은 생각한다.
법당을 중심으로 좌우의 요사채와 맞은편의 종루로써 가람이 미음자꼴로 이루어진 내원정사는 나한도량으로서, 이만한 규모면 “앞으로 이 곳에 누가 오든지” 기도처와 포교처로서의 몫을 다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십 년 불사를 끝내고 한숨 돌린 그가 그간의 불사는 그 일을 위한 초석이었던 것이 아닌가 싶게 달려든 일은 유아 교육 사업이었다. 공원부지로 묶여 있는 주변의 자연적 여건이, 형성기로 이를 만한, 세살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이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환경이 되어 줄 터였다. 천오백 평의 유치원터를 마련하여 정지작업을 하는 한편으로, 유아교육에 대한 여론과 현장 참관으로 자신의 생각을 옹글려 갔다. 독습에 이어 방송통신대학에도 입학했다. 나라 안의 이름난 유치원 뿐만이 아니라 일본길도 서슴지 않았다. 세미나 참여, 연수, 초빙 강연도 빠뜨릴 수 없는 일이었다. 연건평 천백 평의 유치원 건물에는 예절실, 다도실, 요리실, 시청각실, 극화놀이방, 도서실, 교사 연구실, 체육실 등의 부속실을 따로 두어 전문성을 꾀했다. 무엇보다, 스님이 생각했던 대로 유치원 주위의 숲은 아이들에게 자연과 친화하는 심성을 가꾸어 주는 가장 소중한 터가 되었다.
아이들은 그 곳에서 어떤 종류의 나무와 풀과 꽃이 자라는지, 그것들은 철에 띠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본다. 바람 소리나 새 소리 따위가 어떻게 들리는지 적어 본다. 그리고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 삼림욕도 해 본다. 등산도 아우르는 그 날은 일 주일에 한번, 수업이 없는 날이다! 삼천 평의 경내 개간지는 대중의 울력장이기도 하지만, 고사리손들이 갖가지 채소를 직접 심고 가꾸면서 자라는 과정을 볼수 있는 관찰장이기도 하다.
개원 초창기에 그는 절 일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자료를 그리고 만들었으며, 수업 시간은 거의 지켜섰다시피 했다. 겪어 보니 유아교육이란 이론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었고, 실제 경험이 훨씬 유용하였다. 획일식 교육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초등 교육에 비해 유아교육은 훨씬 다양하게 전개할 수가 있었다. 끊임없이 프로그램을 짜고, 제시하고, 아이들의 반응에 따라 수정하였다.
입학하는 아이들은 지적인 면과 정서면, 도덕성, 언어 구사력 따위의 수준 측정을 하고, 그에 맞는 교육 계획을 짠다. 질문을 많이 하되, 한 가지 답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다양한 의견을 지유롭게 펴보이게한다. 그것이 유능한 교사로서 취할바임을 교사들에게 깊이 인식시킨다.
그리고 답도 들이대는 식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고 에돌게 되더라도 아이 스스로가 정답을 찾아가게 한다. 아이들에 대한 관찰 또한 성실히 한다.
(지금 현재 열다섯 반으로 이루어진 원아의 수효는 오백쯤 되고, 스무 명의 행정직을 제외한,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는 교사는 서른 명이니, 교사 한 사람이 맡은 아이의 수효는 열일곱쯤 된다. 선진국의 경우는 1 :5 ~10 정도이나, 한국의 경우는 많으면 1 :40쯤 되는 곳도 있다.) 날마다 일정 수효의 아이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민들어 학부모 면담의 밑자료로 삼는다. 부모는 아이의 결점 부분을 지적받으면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피씨로 입력되어 있는 한 학기 동안의 자료 앞에서는 꼼짝을 할 수가 없다.
유아교육 일에 뛰어든 지 다섯 해쯤 지난 뒤에야 감이 잡혔다. 그 감은 곧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에 이르니, 시교육청으로부터 시범 유치원으로 지정받아 92년도에 전국의 유치원 원장과 교사가 참관한 가운데 공개수업을 절찬리에 끝내고 교육부장관으로부터 “실적 우수유치원”으로 표창까지 받았다. 그 뒤로 정년스님의 유아교육에 대한 뜻과 운영 방식을 보고 배우려고 국내외의 참관단이 줄을 잇게 되었으니 그 수효가 한 해에 마흔쯤 된다.
유아교육 기간이 “가능성의 열린 기간”이라고 할수 있다면, 불법을 전하는 시기로서도 효과적일 터였다.
이 곳에서는 교실마다 불상을 모셔두고 날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침방송을 통해 예불을 올린다.
반야심경을 외고, 찬불가를 부르고, 부처의 밀씀과 우화, 벽화 이야기, 팔정도에 관한 내용의 그림교재 따위가 자연스럽게 섞이는 수업을 받는다. 그리고 사홍서원, 산회가를 외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 짓는다.
이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겨냥하게 될 바는 “도덕적이고 건강한 인간으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바탕을 길러 주는 것” 이라고 정년스님은 말했다.
자연과 유리된 도시 환경,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정 교육 부재, 비전통적인 사고 습관 따위를 극복하고, 더불어 함께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수의 말이나 노자의 도덕관이라도 전할수 있는 것이라고 정년스님은 생각한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떠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정년스님이 필경 부닥치게 될 것이 있을 법했다. 생일날 받은 염주를 소중히 간직하는 아이가, 이 곳을 졸업하고 인근의 가톨릭 재단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 겪게 되는 갈등에 대해 그는 유난히 가슴이 아프다. 그 갈등을 풀 길을 진지하게 짚어 보면서, 현재는 초등학교 건립 부지를 장만해 놓은 상태인 데다가, 도와 주겠다고 스님을 격려하는 신도가 없지는 않으나 그는 아직 곰곰 따져보고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법에 의하면 초등학교 건립터는 해발 이 백오십미터 이하에서만 가능한만큼, 절 뛰에 마련해 둔 부지가 해발 이백구십 미터인 점도 문제였다.
지금부터 발을 벗고 뛰어도 건물을 짓고 첫회 졸업생을 내기까지는 십 년 세월이 걸릴 일이었다. 유치원을 지을 때 돈이 모자라 하도 고생을 해서, 여건이 충족되지 않은 채 그 과정을 되풀이할 일도 엄두가 안나고, 그 때까지의 건강도 “어얘될 똥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참고할만한 일본의 한 초등학교 설계도도 확보해 두었고, 시설이랄지, 양보다 질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의견이랄지, 전원 기숙사 생활이랄지 따위를 풀어 놓는 것에서 초등학교 건립에 대한 스님의 강한 원력이 얽힌다. 그의 표현대로, “상황이 손에 탁 쥐어질 때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제 점점 자신을 돌아다볼 시간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고, 바탕이 웬만하니 “누가 와서 일하든” 할 만할 것이라고 지꾸만 녹여 이야기하지만, 종교인으로서 지역 사회에 기여할 바에 대한 소신이 아직 두렷하니, 엮어지는 인연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자신이 소속된 사회복지법인 불국토를 인연으로, 지난해 연말에 몰운대 종합사회복지관 운영을 위탁받아 이미 천 명 회원을 확보한 일로 보아도 그러하려니와 유치원을 개원할 무렵, 유치원보다는 양로원을 열고 싶어했던 스님의 뜻도 아직 유효해 보이기 때문이다. 몰운대 복지관 옆에서 곧 개원하계 될 병원도 양로원 운영에 대한 중간 점검장치로서 기능하게 될 터였다. 소아과, 내과, 산부인과, 물리치료과로 구성될 이 병원에는 전문 의료인이 상주하여 몰운대 복지관과 함께 인근지역 사회에 의미있는 곳이 되어 줄 터였다. 복지에 관한 일이야말로 종교인들이 깊이 관심을 두어야 할 분야인데도 그동안 사찰에서도 등한히 해 왔거니와, 능력이 있으면 해야 할 일이라고 자신을 다잡아오던 중에 뿌리치지 못한 인연이었다. 시작하였으니 진력하여 풍성히 거두어야 할 일이었다.
하루 이백 톤씩 쏟아지던 내원정사의 물이 구덕터널이 뚫린 뒤로는 육십 톤쯤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 물은 여전히 인근 주민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약수로 한몫을 하고 있다. 절 주위로 울창한 송림 또한 인근의 귀중한 허파가 되어 줄 터였다.
정년스님, 오늘도 이 한가운데 좌중하고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