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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월 삼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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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원철 2001년 01월 227호
올해도 어김없이 신년수첩 한 박스가 소포로 부쳐왔다. 한 해의 바뀜은 달력과 함께 신년수첩이 알려 준다. 한 권을 빼고는 모두 종무소로 보냈다. 꼭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부탁과 아울러. 그래야 보낸 사람도 받는 사람도 제대로 보시공덕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미있는 물건이라 할지라도 별필요도 없는 사람에게 인사치례로 줘봐야 상대방에게는 짐이 될 뿐이다.
금가루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눈에 들어가면 병을 일으키듯이. 이천년이라고 하여 뭔가 특별한 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여느 해와 별다를 바 없는 숫자놀음이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도 일년이 걸린다. 진짜 새천년은 2001년부터라는 농담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이맘때와 똑같은 말장난을 하는 것은 그래도 뭔가 새로운 것에서 희망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실마리를 마음에 마련해 두자는 몸부림으로 여겨진다. ‘절집에서 불기佛紀는 그만두고 웬 타종교의 시간기준을 가지고 함께 호들갑이냐?’는 핀잔도 시간이라는 이름의 상대성을 깨우쳐 주는 좋은 법문이다. 섣달 그믐은 납월 삼십일로도 불린다.
물론 예전에는 음력이 그 기준이었다. 하지만 날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문제일 뿐이지 음력·양력 운운하는 것도 문제의 본질에서 이미 비껴나간 것이다. 어쨌거나 납월 삼십일에는 일년의 마지막 날이라는 단순한 날짜표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년의 마지막 날을 의미하는 섣달 그믐이라는 납월 삼십일을 한 인간의 삶의 연장선 속에서 적용할 때 그건 임종의 날을 뜻한다. 즉 목숨이 다하는 그 날을 말한다. ‘납월 삼십일 염라대왕을 맞이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선사들은 후학들에게 서릿발같이 묻곤 하였다.
죽음 앞에서 그 동안 닦아온 수행의 살림살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준열한 꾸중이었던 것이다. 납월 삼십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중생적 삶의 끝이라는 의미가 더해진다. 끝은 끝인데 생물적 삶의 끝이 아니라 중생사고衆生思考라는 정신적 틀이 깨지는 날이다. 즉 생사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깨침의 날이라는 의미로까지 확대된다. 일년의 마지막이라는 납월 삼십일은 누구나 해마다 맞이한다. 임종의 날이라는 납월 삼십일 역시 누구나 한 번은 맞이한다. 하지만 깨침의 날이라는 납월 삼십일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맞이할 수도 않을 수도 있다는 데 그 묘미가 있다. 어쨌거나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그 날이 참으로 제대로 된 납월 삼십일이다. 하루 해가 지면 발을 뻗고 울었다는 어느 선사 스님의 말이 더욱 생각나는 이즈음이다.

지난 해는 이미 가고 새해가 왔는데도 이 새해를 맞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보신각에서 이미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도 절 마당에 켜져 있는 가로등불은 작년의 것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