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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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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원철 1997년 03월 181호
다비장의 장작더미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름다움이었다. 밤을 지새우고 나니 마지막으로 재만 남아 있을뿐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남은 재마저 허공으로 돌려주고 나니 그야말로 무無였다. 더불어 슬픔이라거나 아름다움이라는 마음까지도 간 곳이 없었다.
저 육신의 죽음이 열반이란 말인가. 다비 뒤의 식어버린 재와 같은 마음이 열반이란 말인가. 아니면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다 포함하는 것이 열반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뜻이 있단 말인가.
열반涅槃은 ‘니르바나nirvana’라는 인도말을 번역한 말이다. 그러나 의미의 번역이 아니라 소리만 빌려 번역한 것이다. 물론 중국에는 열반이란 말을 대신할 만한 단어가 없어 고육지책으로 만들어 냈다. 굳이 번역한다면 적멸寂械 또는 해탈解脫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것도 열반의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한 탓에 이제는 오히려 열반이란 말이 더 익숙해져 버렸다.
니르바나의 사전적 의미는 ‘불어서 끄다’ 라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불어서 꺼진 상태’ 까지도 포함된다. 그것은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끈다는 것이 1차적 의미이다. 곧 마음의 번뇌가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좀 복잡하긴 하지만 잡아함경 제18에서 인용한다면 ‘열반이란 탐욕이 영원히 다한 것이며, 성냄과 어리석음 그리고 일체의 모든 번뇌가 다 사라진 것’ 이라는 뜻이다. 이런 ‘마음의 쉼’이라는 열반은 아울러 몸의 편안함을 부수적으로 가져오기 때문에 ‘몸의 쉼’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그러한 몸의 쉼은 ‘현재의 몸을 가진 채 휴식한다’ 는 의미와 함께 휴식의 한계가 명백한 몸’을 영원히 버리고 진짜 휴식을 취하는 죽음이라는 이미지와 연결되기 마련이다. 이를 부파불교의 학자들은 전자를 유여열반陽驗涅槃, 후자를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고 불렀다. 열반속에 마음의 쉼과 몸의 쉼을 동시에 수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승학자들의 눈에는 이러한 열반의 의미가 너무나 소극적으로 비춰졌던 모양이다. 몸과 마음의 쉼이 열반의 궁극적 의미일 수는 없다고 보았다. 부처님 열반의 본래적 의미가 진정 무엇인지를 찾아내고자 하였다. 이미 설일체유부에서는 열반을 하나의 본연의 자세인 실체적인 경지로 인정하고자 시도한 바가 있기는 하다. 이에 대승에서는 무주처열반無住處漫樂이라는 적극적이고도 이상적인 의미로 열반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곧 열반을 상정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치우친 견해로 보았다. 그리하여 물론 생시에도 머물지 않고 또한 열반에도 머무름 없는 열반을 진정한 열반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미래세가 다하도록 중생을 이익케하는 보살도 실천자의 수행을 무주처 열반이라고 불렀다. ‘지옥의 모든 중생을 성불시킬 때까지 나 역시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열반관도 이것의 연장선상이라고 볼수 있겠다. 물론 여기에서 성불이란 말은 열반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대승불교의 이론을 완성한 용수보살은 열반에 대하여 ‘습관이나 번뇌의 오염에서 벗어난 회론적멸戱論寂滅의 공성空性,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中道’ 라고 학문적 언어로 정리해 놓았다.
이는 생사의 자유자재自由自在라는 선종의 열반관으로 이어진다. 이는 생사즉열반生死聊聽이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열반의 전형은 물론 좌탈坐脫, 곧 앉아서 죽는 것이다. 여기서 죽는 자세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이의를 제기 할 수도 있다. 언제 부처님이 앉아서 돌아가셨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문제는 죽음의 자세가 아니다. 물론 누워서 죽을 수 있지만 앉아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생사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 또 서 있는 자세로 죽은 선사도 많다. 그것도 모자라서 물구나무 자세로 입적한 등은봉鄭隱峰 선사의 열반 모습은 그 자세의 압권이라 하겠다. 공부의 경지를 의심하는 구봉九峰 수좌 앞에서 공부의 증거로 바로 그 자리에서 입적해 버리는 현태玄泰 수좌도 있었거니와, 소산費山 선사가 지의紙衣 선사에게 공부의 사용처를 묻자 그 증거로 그 자리에서 입멸해 버리자 이를 보고서는 ‘다만 어떻게 가는 것만 알뿐이지, 어떻게 오는지는 알지 못한다’ 라고 힐책하자 다시 눈을 떴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자기 제문察文을 스스로 지은 뒤에 그대로 가부좌를 한 채 입적한 고산지원孤山智圓 법사도 있다. 생사가 이렇게 지유로운데 무엇인들 자유롭지 못하겠는가.
열반은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사람에 따서 여러가지 의미로 재해석 되어 사용해 왔다. 그러나 한결같이 전제되고 있는 것은 ‘최고 최후의 완성’ 이라는 의미이다. 삶과 죽음에서도 자유롭고 마음과 몸에서도 자유로우며 그러하기 때문에 생사에도 집착하지 않고 정신과 물질에도 걸리지 않는 대자유의 상태가 바로 열반인 것이다. 그것은 고정되고 규정되는 정지된 개념은 아닌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지혜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 완성을 향한 미완성의 노정까지 포함되며, 완성의 세계와 미완성 세계의 양쪽을 오고감조차 자유로운 그런 경지인 것이다. 거기에는 미완성의 세계를 완성의 세계로 만들겠다는 마음인 대비대원大悲大願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지혜가 바탕이 된 대비대원은 스스로를 완성시킬 뿐만 아니라 미완성의 대상세계까지도 완성시켜 주는 또 하나의 완정된 힘인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열반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의 열반은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