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삶, 예속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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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유영철
1987년 01월 59호
링컨 대통령이 노예를 해방시켰을 때 흑인 노예들은 난감했다. ꡐ주인님ꡑ 이 내쫓으면 갈데없는 부랑아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남부의 혹인 노예들은 노예로 남기를 원했다. 그들은 백인이 가르친 대로 ꡐ주인님ꡑ인 백인보다 훨씬 못한 거의 인간이 아닌 존재로 교육을 받았기에 오히려 계속 예속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 뒤로 차츰차츰 ꡒ우리도 인간이다ꡓ는 자각이 싹텄고 각성한 흑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젠 스스로 스스로를 위한 인권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로써 비로소 진정한 노예 해방이 시작되었다. ꡒ흑인은 추하다ꡓ는 생각도 백인의 허구에 찬 교육이었음이 드러난 지금, 그들은 ꡒ검은 것은 아름답다ꡓ고까지 말하며 자신감과 긍지를 갖게 되었다.
고대 로마에서 오늘의 신문기자 격인 사람은 노예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섬기는 귀족들의 지시로 사회의 정보와 분위기들을 취재하여 보고했다. 그러다 그들은 사회의 다양화와 더불어 상행위, 정치 문화에 관한 정보까지 취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특히 정치에 관한 부분에서는 더욱 그러했고, 언론의 자유는 없었다. 권력의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통이 이어져 민주주의의 상징인 국회 제도가 처음으로 채용되고 시민계급이 정착했던 영국에서도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언론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었다. 그러기까지는 존 밀턴을 비롯한 신문의 자유를 부르짖은 언론 투사들의 공헌이 컸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서구의 언론 자유도 알고보면 필화사건이나 당국의 회유책과 같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난 뒤에 얻어진 것이지 결코 정권 당국자의 양심의 선물로 나누어받은 하루아침의 은총은 아니었다. 앞서간 여러 언론 종사자들의 언론 자유를 위한 투쟁이 있었고 그것을 밑거름으로 하여 오늘날과 같은 언론의 자유가 꽃피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신문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선조임금 때 과거에 떨어진 한량들이 정부의 양해를 얻어 관보 형식인 조보(朝報)를 발간했으나, 관리의 임면 밖에 정계의 동향까지 활자화하는 바람에 얼마 못 가서 임금의 탄압을 받아 폐간되었다고 전한다. (국사 교과서가 고조선의 웅대한 활약상을 사실(史實)이 아닌 신화(神話)로 취급하여 오다 최근에 그 부분을 새로 써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신문 역사도 고대 국가로까지 거슬러올라가 자료들을 발굴 유추한 뒤에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 뒤로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가 고종임금 때에 일본인의 도움으로 발간된 ꡐ한성순보ꡑ가 나오고, 이어서 근대적인 신문의 효시로 꼽히는 독립협회 기관지인 ꡐ독립신문ꡑ 등이 나오게 되었다.
일제 때에 3 ․1운동이 들불처럼 일 때에 우리의 독립과 진취적인 민족성을 일깨우는 지하신문이 수없이 나왔다. 이에 놀란 일제는 그런 불법 신문들의 활동을 억누르는 대신에 허울만 좋은 민족지를 세개 인가해 주었다. 우리가 알기로는 이들 이른바 민족지들이 온갖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꿋꿋하게 민족 언론을 펴다 강제 폐간된 것으로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며 그밖에도 수많은 언론 탄압의 증거로서 몇 차례에 이르는 창간 및 압수 건수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 보기로서 일장기 말소 사건의 언론 탄압에 대한 투쟁의 흔적이긴 하지만, 신문사의 이름을 걸고 사주를 비롯한 신문사 전체의 투쟁 방침이 아니라 피끓는 체육부 기자를 비롯한 몇몇 사람에 의한 사건이었음을 그뒤 사장이 일제 총독부에 사(社)의 방침이 아니었음을 들어 정간에 대해 항의한 점과 해당기자에게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우려 하느냐고 꾸짖은 점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제를 거친 우리는 해방 뒤에 반민족 행위자인 친일배들에 대한 심판과 합당한 조치가 없었던 관계로 가치 기준에 심한 혼란을 가져왔다. 사회 곳곳에서 친일했던 민족반역자들이 재기용되거나 승진하는 마당이어서 친일 성격을 띤 총독부 기관지의 기자들까지도 언론에 계속 종사하게됐다. 일제의 총독부를 옹호하는 기사를 썼던 그런 기지들이 해방 뒤까지 신문사에 간부로 남아 있다보니, 언론인은 언론 본연의 사명과는 달리 정권이 요구하고 회유하는 바에 크게 반발 않고 순종하는 언론인이 되어버렸다.
4․19, 5․16, 10․26을 차례로 거친 뒤인 지금은 어떤가. 언론의 자유가 있는가 없는가 노예들에게도 자유가 있었다.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잘하면 먹고입고 할 자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유가 아님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진취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뒤에서 행동 하나하나를 조종하는 상전이 있고 그것에 예속돼 있다면 자유는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론도 언론에 종사하는 자들에게 편집권, 인사권이 없는 한 언론의 자유는 지켜질 수 없으며 그런 상황에서는 불안해서라도 자유를 누릴 용기가 없어진다.
우리의 언론 상황이 1도(道) 1사(社)라는 테두리에 묶여 있고, 지난 ꡑ80 년에 언론사를 정비할 때에 살아남은 현재의 언론사 사주들은 결과적으로 특혜를 받은 만큼, 언론 본연의 자세를 지켜나가기 위해 특혜를 누리도록 돌봐 준 당국의 처지를 무시하기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솔직히 말하여, 비단 사주가 아니어도 우리의 언론종사자들도 사회적으로 유형무형의 특혜를 받고 있는 한 스스로 고개를 쳐들고 언론의 자유를 위해 몸바칠 각오는 되어 있지 않다. 많은 선례를 들어 아는 그들이라 그럴 경우 결과가 어떠할지를 불보듯 뻔하게 알기 때문이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켰을 때 노예들이 난감해했던 것처럼, 현 상황에 숙련된 언론 종사자들도 이대로 마냥 있다가는 난감한 지경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ꡒ애비는 종이었다. 그러나 애비는 종이었을지언정 노비문서가 불태워진 지는 이미 오래다.ꡓ 언론의 자유, 신문의 자유를 외치기에 앞서 신문사 안에서부터 자체의 언론 및 표현의 자유가 앞서야 하겠다.
자유는 거저 받는 선물이 아니라 애써 찾아먹어야 할 것이다. 언론 종사자 스스로가, 진정 우리나라의 언론 발전과 언론 자유를 원한다면, 언론계를 둘러싼 비민주적인 요인들을 없애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말할 자유, 표현의 자유는 어느 자유보다도 높은 자리에 있으며 인간 생존의 근원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