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이맘때쯤 12월이 깊어지면 마지막 남은 카렌다를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마음은 착찹해진다. ꡐ무엇을 하며 한해를 보냈는가?ꡑ 하는 회한의 그늘이 가슴을 메우는 것이다.
ꡐ또 한해가 아무 의미도 없이 다가버렸구나ꡑ 하고 탄식을 하지만 후회하는 그때뿐 언제나 헛 맹세가 빈 메아리처럼 공허할 때, 한해가 저물고 새해를 맞는 가슴에는, 어떤 막연한 동경을 갖기 보다는 일말의 두려움이 앞선다. 물론, 우리들의 삶을 자로 재듯이, 두붓모를 자르듯이 살 수는 없다. 또, 지선(至善)으로, 최선으로만 채워질 수 있으랴마는, 그래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 갈무리하고 살았느냐하는 생각마저 없다면 또한 어찌 건강한 사람의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언제나 새로운 삶은 지나가버린 삶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마련. 그러므로 새해를 맞는다고 하여 당장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미 우리들이 지어 놓은 인연과 사물 속에서 새롭게 바라보려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새롭게 봄- 이처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모든 사물과 인연들은 거기 그렇게 있음이 아니라 우리들이 바라보는대로 순간 순간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 순간 순간마다 새롭게 보는 사립람에겐 새해니 묵은 해니 하는 사실들이 오히려 진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같은 범인(凡人)들에겐 어찌 지난날의 범상한 일상이 없으랴. 또 세월의 앙금 속에서 여러 빛깔로 선명히 떠오르는 인연의 쓰라림이 없으랴. 옹졸하게 가슴을 져미며 괴로와했던 밤들에 대한 기억들이 너무나 선명하여 잊어버리고자 나는 겨울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 와서 한겨울을 지내고 있다. 나에게 이곳 울산 앞바다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항구도시의 기슭에서 태어나서 잔뼈가 굵었지만 혹 어떤 기회에 바다를 연상하거나 잊히지 않는 바다를 그려 보라면 단연코 울기등대를 중심으로한 방어진 일대의 바닷가를 연상하곤 한다. 그것은 나의 감수성이 한창 싱싱하고 예민했던 젊음의 한 철을 이 바닷가에서 보냈기 때문이었다. 이젠 조선한국(造船韓國)의 상징인양 거대한 도크와 동양 제일의 위용을 자랑하는 시추선이 떠 있고 진종일 기름 냄새와 망치소리에 시달리는 바닷가가 되었지만 그해 여름의 바닷가는 내 젊음 만큼이나 푸르고 싱싱했었다.
넓은 솔밭 아래 지천으로 피어있던 엉겅퀴꽃과 하얀 마타리꽃들, 아침 안개 속에서 환상처럼 떠 있던 작은 바위섬 간간이 솔바람 소리와 함께 해변가 학교 음악실에서 들려오던 합창소리와 오르간소리……. 그해 여름에 나는 출가를 결심하고 서성거리던 마음을 정리할겸 혼자서 훌쩍 찾아간 곳이 지금 이 바닷가였다. 그래서인지 그 바다는 나에게 영영 잊히지 않는 추억의 바다로 남아 있었다.
그 후 현대조선이 들어섰다는 말과 따라서 그 곳 일대가 자꾸 도시화되어 간다는 풍편의 소식을 듣고는 수차례 울산을다녀 오면서도 지척으로 가까운 그곳에는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마음으로 작정했었다. 그것은 내 젊었던 한 때의 추억이 여지없이 깨어져 버릴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떤 인연에서인지 나는 거의 15년만에 훤히 울산만이 한눈에 보이고 내 추억의 바다가내려다 보이는 신라의 고찰 동축사(東竺寺)라는 절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것도 이젠 출가사문이 되어서 말이다.
근년(近年)에 포교다, 잡지편집이다 무엇이다 하고 내 나름대로 명분을 세워가면서 중노릇하고는 거리가 먼 너절하기조차 했던 시정에서의 생활이 끝났을 때 나는 이 바닷가를 생각했고 이 바닷가에서 보냈던 한철을 생각하곤 했었다. 인간이란 끝없이 근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존재인지, 나는 떠돌면서도 계속 한 곳에 정착하기를 바랬고 항구에서 닻을 내리고 서있는 배처럼 안정되기를 바랬다. 나는 이 바닷가에서 세속의 인연을 끊고 출가를 결행했듯이 출가하고 난 뒤 출가로 인하여 너절하게 생겨난 인연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겨울 바다로 온 것이다. 이러한 결단의 의미는 오랜 시간동안 체증처럼 쌓여 온 타성의 늪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서이며 이미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져 있는 몸과 마음에서 필요없는 찌꺼기와 때를 걸러내야겠다는 염원에서다.
그 해 여름 이 바다에서 출가를 결심했듯이 올해에는 이 바닷가에서 모든 인연과 사물들을 새롭게 볼 눈을 가지리라. 새해 아침 여명이 동틀 때 나는 이 겨울 바다에 서 있으리라. 그리고 내 정수리 새빛을 느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