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기대와 지난 아픔과 비애가 서로 교차하는 이 때에 우리 자신들의 마음 깊숙한 곳을 차지하는 공간이 점점 넓어진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며 지난 날들을 되돌아 본다.
지난 한해는 사회 곳곳에서 국민들의 여망인 사회 민주화와 기본 권리들의 쟁취를 위하여 희생을 무릅쓰고 가열차게 실천을 전개히여 그 성과와 기반들도 얼마만큼 확보한 해였다. 민주사회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고 또 그래 왔던, 국민의 심부름꾼은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아야 한다는 의지도 실천으로써 확인하였으며, 민중들은 민중들대로 이데올로기로 교묘히 세력을 유지해가는 권력자들과 가진자들에 대하여 과감한 투쟁으로 철퇴를 가하며 우리 모두의 의지를 나라 안팎에 떨쳐보였다. 거리에서, 학원에서, 농촌과 노동 현장에서, 도시의 빈민 철거 현장에서, 민주화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민중들의 권리와 최소한의 생활과 생존권을 되찾으려는 우렁찬 사자후가 줄을 이으며, 든든한 기반을 쌓아 왔다.
그와 더불어 불교계에서도 현대사의 역사적 분기점이 될 전기가 마련되었다. 연초의 개헌 서명과 스님들의 시국 선언에 이어서, 9 ·7 해인사 승려대회를 통하여 승-가 전체가 한몸이 되어 불교의 탄압과 억압의 족쇄인 불교 제악법 철폐를 선언하고 특정한 정권 및 권력의 예속물이 되어 분규로써 원격조종 당하기를 거부하며 불교의 역사적 사명을 방기했던 점을 반성하여 2,000여 스님들께서 사회 민주화와 불교 자유화 투쟁에 과감히 동참하여 공동의 뜻을 펼쳤으며, 또 그 뒤에 봉은사에서 있었던 불교 자주화 쟁취 대회로 해인사 선언의 정신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보살은 바른 길을 가르치며 가난한 자에게는 재물을 얻게 하며 일체 중생을 평등하고 이롭게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중생 수순(隨順)하는 것은 곧 부처님께 순종하여 공양하는 일이 되고, 중생들을 존중하여 섬기는 것은 곧 부처님을 존중하여 받드는 일이 되며 중생들을 기쁘게하는 것은 곧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되며 부처님은 자비심으로 바탕을 삼기 때문입니다.”고 한 화엄경의 말씀같이, 우리가 사회 정의를 위해 투신함은 불교의 바탕인 자비와 평등이 이 사회에서 구현되게 하려는, 오로지 고난받는 가난한 중생의 뜻에 수순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불교 교단의 지도부와 교단 구성원인 사부대중은 사회의 낮은 곳 천한 곳에서 온 몸으로 고(苦)를 짊어진 민중들의 여망에, 민족사의 화두들에 실천의 응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고난받는 민중 가운데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인 거주의 자유마저 강제로 빼앗기고 산간 벽지의 오지로 밀려나는 철거민들이 있다. 굳이 신문 사회면을 빌어 말하지 않아도, 또 목동이나 사당동이나 상계동의 철거민들을 꼽지 않아도, 그들 철거민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국민소득 2,000불 시대를 자랑하면서 주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도시 재개발 사업은 누구에게만 고(苦)를 전가시키고 있는가. 민중에 수순하지 않고 민중을 존중하지 않는 자 어찌 평등함을 나누어 갖겠는가. 평수 적은 아파트를 지으면 철거 주민 모두가 입주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는데, 넓고 관리비도 꽤 많이 들어가는 아파트를 지어 투기꾼들과 복부인들의 배만 부르게 하는 것이 과연 복지국가 건설을 꿈꾸는 나라의 서민 생활 대책인가.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몇 푼 안되는 보상비 움켜지고 이산 가족 아닌 이산 가족되어 흩어져야 하는 현실을 호소하는 철거민들의 수많은 진정과 항의와 최후의 몸짓들은 신문 한 귀퉁이에 몇 자 떠오르다 이내 잊혀져버리고 만다. 과연 자비와 평등과 정법은 어떻게 어디서 누구에게 구현되고 있는가. 사회 정의와 복지가 진정코 여기에서는 이루어 질 수 없는가. 철거민들의 부릅뜬 눈이 떠오른다. 산간 벽지의 오지, 양계장, 아무런 생계 대책이 없는 그곳에 가서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서울에서는 그나마 노동이나 행상, 외판원 일, 공장일, 파출부 일, 좌판 따위로 밥 줄이라도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식의 교육 문제, 교통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물며 생계 문제에 대한 것까지도 그 대책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복지국가 건설이란 명분이 다만 탁생공론으로 변질-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열반경에 “내가 능히 중생들의 고통을 구할 수 있다면 지옥의 고통이라도 기꺼이 받으리니 이런 까닭에 나는 항상 지옥 가운데 고난 가운데 머무르며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느니라” 했다. 그런데 오늘이 시대의 가진 자는 자신의 이기적인 삶을 위해 다른 쪽에 고난을 전기시키며 그 대가로 부의 과잉 축적과 향락적 소비를 추구한다. 그러나 산업 근로자들을 한번보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상품을 생산하는 산업 전사인 그들에게 나라가 남겨준 것은 세계 최저의 임금과 최장의 노동 시간과 최고의 산업재해 왕국이란 슬픈 타이틀 뿐이다.
그들은 기본 생활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을 받으며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 임금이 낮기 때문에 잔업과 특근들을 해야만 그나마 겨우 먹고 살 수가 있다. 이렇듯 휴식과 여가를 제대로 못 누리니 몸과 정신은 시들어 말라가고 그 피곤한 몸으로 기계처럼 반복되는 일에 매달리니 노동의 가치와 의욕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으며 다만 그런 와중에 인간성을 잃어가는 자기 현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산업재해뿐이다. 통계에 따르면 근로자들이 하루에 평균 5명이 사망하고 500 여명이 부상당한다고 한다. 일년이면 전쟁 한번 치룬 만큼이나 죽고 다친다 하니, 게다가 통계에 누락된 것도 있을 터이니, 엄청난 재난이요 비극이다. 이러한 재난과 비극 앞에서 어찌 자비와 평등과 사랑을 가르침에 있어 고난받고 소외당한 자들의 편에 서서 부처님의 정의를 일으켜 세우고 정법의 사자후를 펼치기를 게을리하겠는가.
올 한해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역사 발전의 법륜이 우리 모두의 힘과 실천의 원력으로 정법을 구현시킴으로써 삶을 부정당한 사람들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