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실감하게 된다. 상상도할 수 없었던 엄청난 일이 벌어져 깜짝 놀라고 난 지 며칠 안 되어 그보다 훨씬 끔찍한 일이 일어나 더욱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러다가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경악했던 자신이 쑥스러울 만한 또 다른 일이 생겨나 우리의 감각 메카니즘에 타격을 가한다. 이러다 보니 어떤 일에 놀란다는 것 자체가 일상화되고 내면화되어 아무리 놀라운 일에도 별로 놀라지 않는 일종의 마비현상이 보편화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런 감각마비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가령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행동을 할 때, 어떻게 하면 진리와 진실에 가까와질 수 있겠는가 애쓰는 것이 당연하며 오직 그것만이 목표이어야 한다. 참되고 옳은 것을 찾아 그것에 근거하여 살려는 노력이야말로 사람의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실제는 어떠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먼저 우리는 이 말이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내게 어떤 손해를 가져오지 않을까 따지는 버릇을 어느덧 가지게 되었다. 일상생활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마 사람 간의 마찰을 줄이고 사회를 원만하게 굴러가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실에 살려는 사람의 엄격한 눈으로 본다면 있는 마찰을 덮어 얼버무리는 것이 결코 옳은 태도일 수 없다. 참된 해결이나 극복은 문제를 감추지 않고 활짝 드러내는 데서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일련의 금지 규정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인류의 역사에 금지가 없었던 사회는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금지 규정이란 의당 사회 구성원들의 공동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합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런 금지 규정들은 성문법의 형태로 존재하든 도덕적 규범의 형태로 존재하든 그 사회 구성원들의 양심의 활동을 억제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고무하고 보장해 주는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에서 우리들의 심신을 얽어매고 있는 수많은 유형무형의 금기들은 양심에 따른 언행과 과연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진실이 담긴 벌언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혹시 어디 걸릴 데가 없는지 겁내고 있지는 않는가. 사상과 행동에서 일종의 자기 검열이 일상화되어 있고 그렇게 되어 있다는 데에 대한 감각의 마비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시대의 위기의 심각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얼마 전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이 돈명(李 敦明) 선생이 민통연 관계자를 집에 숨겨주었다는 혐의로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 하여 구속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3년형이 구형되었다. 그는 1심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ꡒ법으로 인해 오히려 국민의 권리가 축소되고 법이 국민을 엄청나게 탄압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읍니다. 그 법을 위해 법률가가 일하고 있을때, 법률가들의 아픔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내 일신의 안위 때문에 법이라는 이름으로 탄압받는 국민들 편에 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양심을 지켰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읍니까? 저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불의에 쫓기는 한 마리 양을 보호했던 것일 뿐, 결코 범인을 은닉하고 법을 위반했다는 가책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ꡓ 이것은 정의가 무엇이고 법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며 오늘 이 나라의 국가체제가 무엇 위에 세워져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 회의로서, 의식마비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폐부를 찌른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에 따른 발언과 행위 때문에 쫓기고 갇히고 고통받고 있다. 법을 어길 의사가 없었고 법을 위반했다는 가책도 갖지 않은 무수한 범법자들이 존재하는 사회는 정녕 위태로운 사회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는 자기 존립의 도덕적 근거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끊임없는 위험과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발전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정말 위험한 것은 위험 자체라기보다 위험을 알려주는 신호 체계의 고장이다. 열이 나거나 설사를 하는 것은 물론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해열제나 지사제를 먹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고 그 병인을 제거해야 된다. 열이 나고 설사를 하는 것은 사실은 건강을 지키기 위한 우리 몸의 방어 작용이다. 사회나 국가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농성을 하고 데모를 하는 것은 내재된 모순의 자연발생적인 표현으로서 그 국가-사회의 근본적 와해를 막으려는 자기 보존의 활동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을 강제로 억누르려고만 하는 것은 오히려 모순을 심화시키고,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위험을 자초하는 결과에 이르고야 만다.
이 변호사 지신이 법을 위반했다는 가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의 행위에서 범법을 보기보다 법적 정의와 종교적 신념에 충실한 한 인격자의 용기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공권력이 그를 재판에 회부했다면 그것은 한 개인에게 부당한 괴로움을 준다는 뜻에서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구성원 전체가 몸담고 있는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실로 걱정스럽다. 왜냐하면 국가의 공권력이 정의를 대표하지 않고 국민적 동의의 기초 위에 서 있지 않으며 절대다수의 구성원을 승복시킬 만한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 국가는 단순한 물리적 폭력의 기관으로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계층과 당파를 초월해서 우리 모두의 위기이다. 진정한 도덕성의 회복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긴급한 민족적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