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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십년 대작불사, 그 역사적 전개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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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해인사 개산 1,200년 - 무관 1997년 03월 181호
부처님 찬탄 끝이 없어
무량겁에 공功을 이루시니
우뚝하신 자금紫金 빛 장육
금신이여
설산에서 도를 이루시니
미간의 백옥호白玉毫 찬란하신 빛
육도의 어두움을 비추시어
사십구 년의 고구정녕에 말씀
인간과 천상에 두루 전하고
온 법계의 중생에게 보리심 내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지혜를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머리 조아려
저희들 지금 예배합니다.


해인사는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에 있다.
합천군은 신라 통일 이전에는 대량주였고 경덕왕 때 강양군이라 하다가 조선조 태종 때에 이르러서 합천군이라 부르게 되었다. 야로현을 합천군에 병합하면서 각사면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 가야면이 되었다. 치인리는 신라의 하대에 고운 최치원이 그의 처자를 거느리고 가야산에 들어와서 종신하였으므로 치원리致遠里라 하였는데 치인리致仁里로 바꾸어서 부르다가 1914년에 지금의 치인리繼仁里로 고쳤다.
주산인 가야산은 충청, 경상, 전라등 삼도의 경계를 이룬 대덕산의 일맥이 동으로 흘러 성주, 고령, 거창, 합천의 사군의 중앙에 높이 솟은 영산으로써 해발 천사백삼십 미터이다.
가야산은 옛날 가라연방의 요부로서, 인도의 왕사성(Rajagrha)에 있는 영취산의 이름인 가야산을 인용한 것이다. 서거정(1420~1488)의 ‘가야산소리암중창기伽倻山蘇利庵重創記’에는 가야산, 우두산, 상왕산, 설산, 중향산, 지항산 등의 여섯 가지 다른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좋은 산 속에 옛부터 좋은 수행도량修行道場이 있어왔다. 그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가야산에 해인사를 찾아와서 가야산에 대한 찬사가 많았다. 가야산은 영산일 뿐만 아니라 산형山形과 지덕地德이 천하에 제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해인사고적海印寺古籍’에 산형절어천하山形絶於天下하고 지덕척어해동地德隻於海東이라 했고, 세조완문世祖完文이나 하진태, 이색 등도 가야산을 찬미하는 글들을 남겼다. 가야산은 산이 첩첩이고 수목이 우거졌으며 철따라 과실과 니물이 많고 계곡이 아름답고 물이 맑으며 많은 스님네가 살고 있는 곳이다.
절 이름을 해인사라 한 것은 법화경을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味, 열반경은 부동삼매不動三味, 능엄경은 수능엄삼매首標嚴三味. 원각경은 원각삼매圓覺三味라 하듯이 화엄경의 해인삼매海人三味에서 유래했다.
삼매三味는 선정의 이름인데 마치 고요한 바다에 온갖 사물의 그림자가 도장처럼 찍히듯이 부처님의 지혜 바다에 일체만법이 역력히 비치므로 이를 해인삼매라 했다. 이로써 해인사는 화엄경의 종지宗旨를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수행하는 도량의 의미를 갖는다. 바다는 모든 물이 돌아가는 곳이고 모이는 곳이다. 넘치지 않고 부족함이 없으며 영원히 살아 숨쉬는 곳이다. 도장으로 여겨지는 것은 바른 것을 결정하고 삿된 것을 가려내는 데 쓰이는 도장처럼 모든 사실을 밝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신라의 고승 의상 대사가 668년 당나라 종남산의 지장사에서 지엄스님의 화엄경강석에서 공부할 때, 지엄스님이 해인 스물두 개를 그려서 제자들에게 보였다.
의상 대사는 한 개의 도형 법성도法性圖를 완성해서 지상 대사에게 보이니, “의상의 해인은 총總이요 나의 해인은 별別이다. 화엄경의 깊은 뜻이 그대 한개 해인 가운데 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의상 대사는 법성게도 함께 지으셨는데 칠 언, 삼십 구, 이백십 자로 되어있다. 해인사는 이런 화엄경의 해인삼매와 의상 대사의 화엄경을 요약한 법성게의 내용을 형상화하고 진리를 증득할 해인삼매를 근본이념으로 창사되었다.

사람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곳에 따르고 땅의 성하고 쇠함은 시절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했다. 해인사는 의상대사의 제자 상원이 신림에게, 신림은 다시 순응에게 전하고, 순용 대덕順應大德이 이정 대덕理貞大德과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이 곳에 서기 802년에 창건하여 오는 서기 2002년이 되면 창사 천이백주년이 된다.
최치원이 지은 해인사선안주원海印寺善安主院 벽기壁記에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사람은 옥을 다듬듯이 하여야 하고, 세상에는 금을 감추듯이 함이 귀한 것이다. 이미 하늘과 땅이 신령스러움을 지었다면 산천의 아름다움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하룻밤을 자고 가는 새도 나무를 가린다는데 내가 어찌 있을 곳을 마련하지 않으리요.” 이와같이 말을 하고 최치원은 해인사에 들어오는 입구 홍류동에서 살았다.
또 “해인사는 삼학三學을 닦는 곳이라, 제자들이 안개같이 바위 위에 모이고 노덕들은 이슬처럼 숲 속에 모였다. 구름이 솟아 오르듯 노을이 터지듯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좋아졌다. 그리하여 가야산의 좋은 경치는 도를 이룰 만한 터가 되었고 해인사의 보배 구슬은 한없이 값이 올라가게 되었다.” 이처럼 해인사는 수행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예나 지금이나 갖추고 있다.
그 뒤 서기 930년경 회랑 대덕이 중창하고, 조선조에는 등곡 학조스님이 절을 중건하고, 대장경 판당板堂을 증개축하여 삼년 동안에 대적광전 등 여러 당堂과 요察 등 백육집 간을 세웠다. 대장경 판이 해인사에 옮겨 온 것이 서기 1398년이니 1998년이면 이운 육백 주년이 되는 해가 된다.
해방뒤에는 청담, 성철, 고암, 지운, 운허, 영암스님 등이 해인사를 중건하기에 힘써왔고 1962년 통합종단 이후 고암古庵, 성철스님이 해인총림의 방장으로 주석하면서 전국의 제일 수도도량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주지 스님이 가람 수호를 애써 왔고 지금 방장인 법전스님이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제 창건 천이백 주년과 대장경 이운 보관 육백주년을 눈앞에 두고 명실 상부한 사부대중의 수행 공간과 민족 문화의 새로운 창달을 위하여 불보살님전에 서원을 세우고, 앞으로의 백년대계를 위한 민족 문화공간으로 해인사를 새롭게 창출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우리 문화를 논할 때에는 언제나 불교를 말한다. 그것은 신라와 고려뿐만 아니라 조선조의 배불숭유 정책 속에서도 우리 문화를 보존하고 가꾸고 일구어 온 곳이 사찰dl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문화유산이 있더라도 그것을 지킬 능력이 없으면 그 문화는 소멸되고 만다. 창건 천이백 주년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문화의 영속성이라는 점에서 큰의미를 지닌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