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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연극을 기다리며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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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 김미미 1987년 01월 59호
불교는 정법구현의 지고한 교리 외에도 일반 제종교와 마찬가지로 풍부하고도 독자적인 고유의 예술 영역을 갖고 있다. 탱화나 불상, 탑파, 전통적 사찰 건축등으로 대변되는 조형 미술 분야가 그러하고 염불이나 범패등의 음악류와 수많은 경전과 선사들이 남긴 시가(詩歌) 문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면모를 보여 준다. 여기에 승무나 바라춤 등의 의식무(儀式舞)까지 더한다면 그야말로 불교는 예술의 전 장르에 걸쳐 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불교 예술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연극만이 없다. 다른 종교의 예는 접어두고서라도 발상지인 인도와 그밖의 중국, 일본을 비롯하여 불교가 전래된 아시아 제국(諸國)에서는 모두 존재했고, 또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다양한 형태의 불교 연극이 왜 우리나라에만 없느냐는 것은 상당히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이다. 한반도에는 원래부터 불교 연극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우리의 조상들은 불교와 연극을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겨왔을까? 혹은 연극은 불교의 제예술형태와는 다소 격이 맞지 않는 번잡한 예술의 형태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삼국유사 및 현존하는 국내외 여러 사료(史料)에서 발견하게 된다. 백제에서 연희되다 후일 일본으로 전파된 기악(伎樂)이 그것이요,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행해지던 무애희(無碍戱)가 그것이다. 이밖에도 한국 불교 연극사의 맥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는 많다(이에 관해서는 다음호 ‘한국불교 연극사’편에서 자세히 논하기로 한다). 이는 곧 분명하게 한국 불교사의 일장을 차지하던 연극의 존재사실을 입증해 주는 귀중한 사실들이다.
대체로 종교에서 파생된 예술은 통속적 개념의 일반 예술과는 다른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일반예술의 목적이 진·선·미의 추구에 있다면, 불교를 위시한 종교 예술은 이와 더불어, 또한 이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소기의 목적성을 갖는다. 그것은 돌을 고르고 다듬어 마지막 한 번의 망치질에 이르기까지, 혹은 화선지에 옮겨지는 경건한 모필의 한획 한획에 이르기까지 출발에서 완성으로 이르는 시종(始終)이 숭고한 종교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단순한 보시나, 공양혹은포교에 머무르지 않고, 깨달음을 지향하는 수행의 근본 정신과도 무관치 않음을 생각할 때, 불교에 있어 예술이 가지는 의미를 한낱 여가나 유흥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즉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표현 양식의 이면에는 단순한 종교와의 종속 관계를 초월하여 근본에로 귀결되는 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극락정토의 건축이나 나무, 새, 시냇물의 장엄상 하나하나가 다 반야바라밀을 깨우치기 위한 장치임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더우기 불교의 궁극적 회기처가 삶의 무상성, 존재의 허구성(空性)을 깨우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불교 연극은 또다른 각도로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연극이란 판마디로 극작가에 의해 쓰여진 희곡이 배우의 연기를 통해, 극장이라는 협의의 장소에서, 관객을 향해 연출되는 일회성(一回住)의 종합 예술이다. 관객은 과거로부터 현재·미래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일, 일어나고 있는 일, 또는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인간사의 단면들을 무대라는 만화경을 통해 대하게 된다. 그것은 일상사에서 ‘극적인 사건’, 혹은 ‘연극같은 이야기’ 등의 단어로 대변되는 사실이 아닌, 즉 일체 허구의 조작된 현실이다. 고로 관객은 극장에 들어가는 순간, 지금부터 무대에서 일어날 모든 사건들은 실제가 아니며, 아무개의 배역을 맡은 배우 역시 실제의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관객들은 일제히 극과 함께 흥분하고 웃고 울며, 마치 극 자체가 하나의 진실 세계인 양 착각을 하여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연극에서는 ‘극적환상에로의 감정이입’이라 부른다.
이에 관해, 필자의 오랜 기억 속에 남아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본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여름만 되면 극장이고 TV고 간에 할 것 없이 납량물이라 히여 괴기 · 공포영화를 무더기로 쏟아내곤 했었다. 무섭고 한편으론 두려움마저 주는 그 괴기물을 보며 잠지리를 설치기 일쑤였던 어린날의 여름이었다. 철없던 생각에도 매번 영화속에서 위기가 임박할 적마다 속으로 ‘이건 사실이 아니야. 저 무서운 귀신 뒤에도 이걸 찍어대는 카메라맨이나 조명 기사가 있을거야. 그리고 죽었던 저 배우는 촬영이 끝나면 툭툭 털고 일어나 농담을 하며 국수라도 먹을지 모르지…’ 등등의 굳은 다짐으로 극적 환상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려 애를 쓴 기억이었다. 하지만 종내 TV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던걸 보면, 어쩌면 인간은 이처럼 환상이 주는 실제감을 두려움 속에서 은근히 즐기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커다란 무대요, 우리는 각자의 배역을 살다 죽어가는 배우리는 통찰이 비단 세익스피어나 도가(道家)측의 생각만은 아니었다. 이천 오백여년 전의 석가 역시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무수한 설법과 비유를 통해 업이 닳도록 외쳐대던 이야기였다. 더우기 그는 그것이 환상이므로 부질없다거나, 버려야 된다고 여기기보다는 치열한 역사 의식으로 변화와 생멸의 와중에 놓인 삶을 마지막까지 뜨겁고 진실되이 살다 간 사람이었다. 이는 실로 그가 삶과 존재의 무상성 ·허구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는 역설적 논리를 성립시킨다.
연극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가 환상이며, 거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환상이며 거짓이라 해서 그것을 외면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속에서 삶의 내면에 깔린 진실의 음성을 찾으려하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으려한다. 그리고 보다 더 진지하게 바라보며 접근하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불교가 연극을 보는 관점이나, 연극이 불교를 보는 관점 양자간에 등식이 성립될 수 있으리라 감히 제언해 본다.
이점에 있어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론을 편 이는 독일의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베어톨트 브레히트이다. 그는 관객의 극적 환상에의 몰입을 제지하는 여러 효과를 통해 동화된 상태가 아닌 깨어있는 상태에서 관극할 것을 그의 서사극 이론에서 주장했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깨어있는 상태란, 뚜렷한 인식과 판단력을 가진 관찰자로서의 태도를 말한다. 그리고 극중의 배역을 맡은 배우 역시 자신의 역할에 몰입·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일정한 심미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냉정하게 비판적 입장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외 효과(Alienation Effect)’라고도 불리우는 브레히트의 이 서사극 이론은, 종래의 연극이 정서적으로 관중을 극 속에 동화시켜 판단력을 상실케하는 점에 대응하여 관중으로 하여금 인식해서 음미하고 또한 어떤 결론을 내리게끔 유도하는 목적극의 성격마저 띠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브레히트가 노렸던 궁극적 목표가 실체라고 여기는 현실에의 올바른 직시였다면, 불교에서는 그 현실마저도 여전히 연극의 연속이며, 환상의 속성을 가진 허구의 세계라는 점을 통 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는 연극으로 표상되는 가상의 세계가 현실과 유리,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내포, 외연의 관계를 가지며, 끊임없는 상호 자극에 의해 공존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야말로 불교 연극이 나아가야할 깨달음을 지향하는 포교 형식의 한 방편인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 연극은 종래의 종교극이 지녔던 교리의 전달이라는 정보지향적 성격을 한 단계 승화시켜 보다 본격적인 수행 및 정법교화의 방편으로 재숙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이르는 길은 멀고 험난하다. 불교 연극의 역사적 계보 정리나, 마땅한 불교 극단마저 제대로 없는 실정에서, 연극을 통한 수행이니 교화니 하는 말은 어쩌면 시기 상조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불교인 스스로도 불교 연극의 존재에 대한 당위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지 못한 지금으로는 연극이란 그저 단순한 부차 예술의 의미로밖에는 들리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선은 땅속에 묻히고 풍우에 조각난 역사의 파편들을 캐내고 모아, 복원도를 그려보고 중수할 계획부터 세워보는게 순서일지도 모른다. 그러자면 문헌으로 혹은 구전으로만 전해오는 유형·무형의 자료들을 수집, 분석, 정리하는 작업이 선결되어야하고, 연극화 문제에 따르는 실제적인 방법론이 대두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간헐적이고도 미미한 불교 연극 활동의 문제점 및 현실적 개선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보다 이상적인 불교 연극과 극단이 이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애정을 가지고 도와주고 지켜보아야할 것이다.
끝으로 현대사회와 불교가 절실히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보다 참신한 불교 연극을 기다리며 집필 기간중 삼가 독자의 끊임없는 제언과 질타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