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불물교사를 기술하는 관점
종교는, 역사 사회 속에서 종교의 집단이기주의를 지양하고, 민족사적 측면에서 그 역할을 창출해내는 모습으로 자기실현이 경주되어야 한다. 종교가 지니고 있는 속성으로서의 초월성은 자칫 잘못하면 오도된 코스모폴리타니즘(사해 동포주의)을 창출해 낼 수도 있다. 또한 세계사적 이해라는 틀에 맞출 때도 민족적 주체사관은 그 빛을 잃고 역사 사실에 대한 옳바른 이해와 평가를 결하게 된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한국불교사의 기술은 민족사적 위치에서 한국불교사의 조망이 요구되어 진다.
불교의 목적이 불국정토의 건설과 고통받는 인간의 완전한 해방에 있다고 볼 때 불교의 역사적 실천 노력은 인간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모든 것-가정, 사회 제도, 신분, 도덕과 윤리, 국가, 사상등-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일에 투여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인간의 이기심까지도 타파하고 이 우주의 만 생명과 절대합일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어떤 주의 주장이나 집단적 이기심에 안주하기를 거부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일체의 억압 수단을 거부하기 때문에 한 민족이 다른 민족으로부터 억압과 지배를 받을 때도 그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민족의 주체성과 자존을 침해하는 모든 민족내의 원인들에 대해서도 그 혁파를 과감히 실행하여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1600년의 한국불교사를 되돌아 볼 때 잘 알수 있다. 또한 중국과 인도의 불교가 민족적 이기심을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이 강대 민족이었기 때문이며 베트남과 버마 등 동남아시아의 불교가 철저히 민족주의의 길을 추구한 것은 그들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 온 피지배 약소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사는, 민족사와 그 맥락을 같이하여 외세의 종속으로부터의 “민족주체성 확립”이라는 관점과, 역사 사회 속에서 민족의 주체로 부각되어져야 하는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민중지향적 보살행”이라는 관점의, 두개의 기둥을 기준으로 하여 한국사의 한 부분으로서 조망되어야 할 것이다.
3. “창조적 진보세력”들의 역사적 전통
한국불교가 1600년의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민족적 종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민중의 고통과 수난을 함께 하면서 민족의 통일과 해방을 지향할 때만이 민족종교로서 그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몽고란이나 임진왜란과 같이 민족의 생존이 위협받을 때는 무력투쟁까지도 불사하였다. 개항이후 근세 백년에 있어서도 일본제국주의의 수탈과 억압으로부터 수탈의 대상인 민중과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제국주의 일본과 친일 매판세력에 대해 줄기찬 대항을 하였다. 조선말 삼도농민봉기에서부터 갑오농민전쟁, 의병전쟁, 항일독립투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반제, 반봉건 민족운동에 불교도가 참여한 사실은 이것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호국불교의 전통 또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근세 한국불교의 반역사적 행위로 말미암아 호국불교를 마치 호정권불교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모른다. 신라인에게 있어 호국의 “국”이란 “나라”나 “정부”가 아니라 “불국” 즉 부처님의 정법이 구현되어 중생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세계인 것이다. 신라인은 불타의 힘으로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강한 믿음으로 상하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사상 유례가 없는 완벽한 일체감을 형성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불국정토구현은 우선 갈라져 있는 나라를 통일시키는 것이었다. 이렇듯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통일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불교의 힘이었다. 그러나 통일이 되고 신라의 후기에 접어들면서 호국불교는 중대한 변동이 가해진다. 미륵신앙 자체가 갖는 평등주의와 혁명성으로 인해 국토통일은 이루었지만 아시아적 고대 노예제의 온존강화로 “불국토”는 멀어지고 민중의 고통이 점점 가중되면서 미륵신앙인들이 저항적 입장을 표명하게 된 것이다. 이에 지배계급은 현세적 미륵신앙을 내세적 미타신앙으로 대체, 주입하며 민중의 저항의지를 꺾고 호굴불교를 자신들의 정권유지의 방편으로 왜곡시켜 백성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이같은 호국=호정권의 왜곡된 논리가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따지고 보면 삼국의 불교수용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한국불교의 민중적 전개의 근간을 이룬 것은 미륵신앙이었다. 미륵신앙의 궁극 목표인 용화세계는 완전한 형태의 인간평등의 항구적 구현체라는 데서 노예제, 봉건제의 신분적 질곡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따라서 미륵신앙은 신분적 계급사회에서 억압받던 민중들에게는 해방과 구원의 신앙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순박한 미륵불에서 뿐만 아니라 바위나 점잖게 생긴 돌까지도 미륵불로 불리워지고 신앙되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국불교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민중의 입장에 서서 이상세계의 도래를 기원하는 당래불(當來佛)로서의 미륵신앙이 민중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미륵신앙의 전개를 살펴보면서 그 “창조적 진보세력”들의 역사사회 속에서의 구체화된 모습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신라의 미륵신앙은 미륵님이 화랑으로 화현한다는 점에서 인격적인 구현을 이상으로 삼았다. 반면 백제의 경우에는 불국토 신앙으로 발전하여 국토와 민중 전부가 용화세계와 미륵이라고 하는 미륵하생의 역사를 지향한다. 백제가 국가율령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 미륵신앙이 갖는 평등주의와 혁명성으로 인해 지배층의 탄압을 받게되자 미륵신앙은 역사와 민중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게 된다. 그리하여 미륵신앙은 이후의 역사를 통해 그 혁명적 에너지를 수시로 폭발하게 된다.
통일신라 말 정신과 사회질서의 혼란을 틈타 당시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던 미륵신앙에 의존하여 궁예, 견훤은 후삼국을 성립하였다. 그후 고려시대에도 왕권 안정을 위해 불교를 이용하게 된다. 이는 불교의 귀족화와 아울러 불교의 대중화도 이루어 놓아 민간신앙과의 습합어 강해지는 결과로 나타난다. 또한 조선조 주자학 체제에서 미륵신앙은 소외된 천민계급과 더욱 밀착하게 된다. 가혹한 불교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조성된 미륵불의 발견에서 그들의 회원을 알 수 있지만 중세사 전반에 나타난 민중봉기에 불교가 깊이 관계함으로써 민종종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즉 고려조 만적의 난이나 묘청스님 신돈스님의 거사계획, 조선조 숙종 연간의 장길산과 연루된 숭려의 거사계획 검계 살주계의 미륵신앙사건 또한 홍경래의 난에도 승려가 깊이 관여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것이다.
조선조 억불정책 아래서 불교의 사회적 지위는 떨어지고 산중으로 은거하게 되었지만 민족종교로서의 영향력은 여전히 대단하였다. 개화기에 있어서도 불교는 사해평등사상과 부정(空)의 논리를 바탕으로 봉건적 계급질서를 부정함으로써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당시 중인계급에 속한 불교인 유 대치나 오 경석의 역할은 매우 컸다.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완전히 식민지화되면서 한용운을 중심으로 한 신간회 활동, 자매단체인 근우회의 반봉건 반제투생 등의 민족해방운동에 불교도는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합법적 민족통일 전선체였던 신간회가 해체되면서 불교의 혁신운동은 비합적 비밀결사로 전환되고, l930년 젊은 승려를 중심으로 “卍당”이 조직되기에 이른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민족해방운동은 만주나 중국에서의 무장투쟁으로 전환되며 불교운동도 완전히 지하로 잠복하고 뜻있는 승려들은 만주로 가서 무장투쟁 세력에 합류하게 될 뿐만아니라 그렇지 않은 국내 잔존세력은 지하운동으로 독립자금을 거출하여 만주등지로 보내기도 하였다. 무장투쟁 세력에 합류한 대표적인 예로는 금강산의 붉은 승려라고 불리었던 김성숙(당시 김 충장이라는 가명 사용)이 있고 국내 잔존 세력으로서는 운허, 강석주 등 진보적 민족주의 입장을 견지한 불교혁신동맹 승려들이 있었다.
해방이후 청년 승려와 재가신도를 중심으로 불교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해 노력한 불교혁신 세력은 좌익으로 몰려 그 뜻이 무산되고 또한 6 ·25를 맞이하여 혼란만 가중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거칠게 나마 일별해 본 한국불교의 “창조적 진보세력”의 발자취는 그 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하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본 연재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불교계의 “창조적 진보세력”들의 노력들을 민족사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망해 보려는 의도에서 계획되었다. 앞으로 독자 여러분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