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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과 소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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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읽는 불교교리 - 현응 1987년 01월 59호
말을 아끼는 집안의 가풍(家風)에 젖어 살다 보니, 사제님과는 평소에도 늘상 오고가며 만나곤 하지만 이렇다 할 따스한 인삿말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것이 참 겸연쩍은 일입니다. 옛말에 선비는 사흘이라도 서로 보지 못하다가 만나면 눈을 부비고 자세히 상대를 살펴보아야 한다 했다는데, 하물며 우리는 명색이 하루하루를 남모르는 정진력으로 일취월장 자신을 향상시켜야 하는 구도의 과정에 있는 수도승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도 수행자들이 서로 만나 자리를 같이하게 되면 항상 진리에 대해 토론하고 탁마하기를 게을리 말라 하셨는데 자신의 부족하고 명확하지 못함을 ‘유마의 침묵’을 빙자하여 꿀먹은 벙어리 모양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고 있으니, 생각하면 식은땀 나는 노릇입니다.
그러고 보니 사제님이 불문(佛門)에 들어온 지도 꽤 여러해가 되었군요. 부처님 경전도 어느 정도 열람한 터이고, 한사람의 출자사문으로서 나름대로의 입장을 정립했을 때라 생각됩니다. 그래, 중노릇은 할만 한가요? 하기사 이젠 ‘첫 보리심을 내는 순간 정각(正覺)을 이룬다’는 말 정도는 아무 부담없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보리심을 과연 내기는 내었읍니까? 진리의 북을 올리는 데는 앞섬과 뒤섬의 우열이 없다 했으니 사제님과 나도 선후배를 떠나서 기탄없이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되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기왕 우리가 평소 못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이렇게 편지로나마 하게 되었으니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마음 설레입니다.
먼저 생각난 김에, 지난번 사제님이 여행중에 고등학생에게서 대승과 소승의 구분을 해달라는 질문을 받고 아는대로 일러주었는데도 그리 썩 시원하게 느끼는 것 같지 않아 안타까웠다고 했으니, 차제에 대승과 소승의 문제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면 어떻겠읍니까? 이 이야기 속에는 많은 중요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다만…….
무엇이 대승(大乘)이며 무엇이 소승(小乘)일까? 우선 대승이라면 큰 수레 소승은 작은 수레로 번역될 터이고, 그래서 대승불교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면, 소승불교는 한 사람밖에 타고갈 수없는 가르침 - 하기사 대승의 관점에서 보면 소승의 가르침은 자기 한몸조차 구하지 못 한다지만 - 이라고 상식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요. 그리고 남방불교(태국, 스리랑카, 미얀마등)는 소승이고 북방불교(한국, 중국, 일본 등)는 대승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읍니다. 아무튼 교리로 보나 교단 발달사로 보나 대승과 소승을 구분짓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런 통상적인 구분으로는 어쩐지 속시원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노상 있읍니다. 또 한국불교를 대승불교권으로 분류하고는 있는데, 글쎄, 한국불교의 어떤 점을 보고 대승이라할 수 있는지 조금은 회의하는 처지이다 보니,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시 한번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보면 어떨지 한번 감정해 보길 바랍니다.
대승이란 방면바라밀을 구비한 것이고, 소승이란 그렇지 못한 것이라고 봅니다. 곧, 자전거를 두고 이야기할 때 두 개의 바퀴가 쓰러지지 않고 설 수 있는 역학적인 균형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이라든지 그것을 몸으로 습득하여 운전할수 있게 되는 일은 여전히 소승일 터이고, 그 자전거를 타고 어떤 목적과 목표를 세워 부산이나 또는 서울로 운전해가는 일은 대승일 터입니다.
대승불교의 실천적 주체를 ‘보살’이라고 부르는데 - 난보살이란 말을 아주 멋진 표현이라 생각하지요-‘보살’이란 아다시피 ‘보리(보디)’와 ‘살타(사트바)’의 합성어 아닙니까? 이때 ‘보리’란 연기적 존재(空)를 이해하는 관점, 곧 깨달음이고 ‘살타’는 그것이 구체적인 상황과 역사에 적용된다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살’이란 구체적인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 어떠어떠한 처지에서 이러저러한 구체적인 판단과 결정을 내려 고유한 표현과 실천을 행하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보살이란 역사 속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총체적인 판단 기준과 행동 양식을 가진 자를 말함인데, 단순히 순간순간마다 행동과 사고에서 판단과 결정을 요하는 모든 사람의 경우에 다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태도와 행동이 ‘보리’의 시각에 근거해 있다는 점에서 ‘보살’이라는 고유한 성격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의 이러한 구체적이고도 역사적인 처지와 행동양식을 일러 대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긴 또 어떻습니까?
번뇌나 욕망을 끊어 제거하는 것은 소승, 번뇌나 욕망의 연기성(공성=관계와 변화성)을 깨달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대승, 아니 더 적합하게 표현하자면 번뇌와 욕망에로의 자유가 대승의 진면목입니다. 다시 말해, 이 자유는 번뇌와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번뇌와 욕망 속에서 얻는 자유이겠지요.
이렇게 보면 번뇌와 욕망은 대승불교(곧 참다운 불교)와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 결코 아닌 것이지요. 오히려 번뇌와 욕망을 적극 활용하며 번뇌와 욕망속에서 - 삶이란 결국 번뇌와 욕망으로 생성 변화한다고 봅니다 -우리 삶의 자세를 정립하고 실천해 나가는 일 그것이 불교라고 믿습니다. (혹 사제님은 이런 말이 큰일 날 소리라고 생각지는 않는지요?) 그래서, 불교는 번뇌와 욕망을 버리고 끊는 것이라는 일반의 통념과는 달리, 오히려 긍정적인 번뇌론, 욕망론에 근거해야 한다고까지 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앞서 말한 ‘방편바라밀’이라는 말이 많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바라밀’은 실천이라는 뜻인데 그냥 실천이라 하지 않고 ‘바라밀’이라고 굳이 표현함은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한 실천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마치 보살이 ‘살타’와 ‘보리’가 결합된 말이듯이 말입니다. 이렇듯 의미심장한 ‘바라밀’이라는 말을 ‘방편’이라는 말과 합쳐서 ‘방편바라밀’이라 한 것에 주목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바라밀’없이 ‘방편’만 있다면 무지한 타협이요, 휩쓸림밖에 되지 않을테니까요.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실천으로서 통상 여섯 바라밀을 드는데, 아다시피 보시 바라밀(베푸는 일), 지계 바라밀(도덕척 규범의 실천), 인욕 바라밀(참는 일), 정진 바라밀(노력), 선정 바라밀(집중하는 맑은정신), 반야바라밀(존재의 속성을 통찰하는 지혜)이죠. 그러나 난 이 여섯 바라밀도 앞서 내린 정의에 비추어보면 여전히 소승의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엔 아직 역사(구체성)가 빠져 있기 때문이지요. 이 기본적인 여섯 바라밀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구현시키느냐, 곧, 역사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느냐가 바로 제일곱번째 방편바라밀인데, 여섯 바라밀이라는보편적이고도 추상적인 노력을 구체적이고 상황을 결정하는 방편바라밀과 결부시킬 때 비로소 대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고 봅니다.
이렇게 보면 고집멸도(苦集滅道)도 소승이요, 8정도도 소승, 여섯바라밀, 37조도품(助道品)도 소승, 4섭법(攝法), 4무량심(無量心)도 소승입니다. 이 모든 좋은 법들은 제7의 방편바라밀을 만나야 비로소 대승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에서라면 오늘날 우리 불교에서 대승은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읍니까?
‘모든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부지런히 노력하라’, ‘나쁜 일을 하지 말라’, ‘자비를 행하라’,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하라’, ‘대승보살의 실천을 해라’, ‘불교의 실천이 좀 더 역사화되고 구체화되어야 한다’ …는 것과 같은 말조차 여전히 소승불교의 영역입니다. 대승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승이 새삼스럽거나 놀라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주위(사회속의 생활인)를 한번 살펴봅시다. 그리고 정진에 몸을 돌보지 않는 수행자를 살펴봅시다. 대승은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니까요. 사실 어쩌면 우린 이름없는 무수한 보살들의 대승적 삶을 무심히 지나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과연 현재 우리 주위의 보살은 어떤 차원의 생각으로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까요. 하긴 나도 잘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살의 행동양식은 보살의 수만큼 많을 테니까요. 그리고 오늘의 땅에서 취해야 할 보살의 유형이 정형화된다거나 집단화된다고도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제님에게 쓰는 첫편지에서 하필이면 왜 대승과 소승 이야기부터 먼저 하게 되었는지 나도 잘모르겠읍니다. 우린 사실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사소한 일상사에서부터 공부하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 기울여야 할 관심, 이것 저것 따지거나 눈치보지 말고 눈 질끈 감고 밀어부쳐야 할것둘…
그렇지만 옛날의 수행자들도 그러했듯이 나의 경우에도 주요 문제는 늘상 우리 삶의 문제였읍니다. 그리고 삶의 다른 모습이기도 한 사회나 역사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다보니 부처님 말씀도 바로 이 부분에 대한 기본적인 해명과 가르침이라는 확신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대승과 소승이라는 틀을 세운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최근에 와선 이러한 분류에 따라 불교를 이해하고 따지는 일도 무척 고루하게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원론을 재확인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그리고 이런 태도야말로 또 하나의 소승의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읍니까? 하지만 오늘의 우리 불교를 우울하게 여기게 하거나 그와 반대로 희망차게 느끼게 하는 것도 다 이런 문제에 대한 극복 여하에 달린게 아닐까 생각해서 사제님에게 자연스레 이러한 이야기를 하게 된것 같습니다.
아무려나 지난 여름의 그 무성했던 잎새들도 다 져버리고 겨울이 한충 깊어가고 있읍니다. 우리들의 많은 움직임도 이젠 봄을 다시 예비해야 하리라 봅니다. 새해엔 더욱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해를 맞으며 못난 사형 부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