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崔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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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고려대장경 - 최세영
1997년 02월 180호
고려국에 살았던 최동. 고려대장경 조성 때에 각수였던 최총각, 그가 칠백육십 년의 시간을 넘어서 우리에게 되살아난 것은 몇 해 전 일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박상국 실장에 의해서 그의 존재가 알려졌다. “대장도감의 판각성격과 선원사문제’라는 그의 논문에 나와 있는 최동은 갑진년인 l244년에 「법원주림」권 49와 95를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하고 대장도감에서 「법원주림」 72권과「근본설일체유부백일갈마」제5권을 판각한 각수이다.
이러한 최동은 우리에게 판각 장소에 대해서 새로운 의문을 던져 주었다. 고려대장경 판각 장소에 대해서는 사료에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종경록」 권 27과 42간기에 정미세 고려국 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이라고만 나와 있다. 남해, 남해분사대장도감.
박상국 실장은 한 사람의 각수가 같은 해에 강화도 대장도감과 남해분사대장도감을 오가며 고려대장경을 판각하기에는 어려운 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고려대장경 모두가 남해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되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남해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나와 있는 단 두 장의 경판,「종경록」. 이 「종경록」은 모두 l00권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가운데에서 권51 ~100권은 l248년에 남해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되었다. 이러한 대장경판을 분사대장경판이라 하는데 경판 한 장에 한 사람의 각수 또는 무려 네 사람의 각수 명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 장의 경판을 새기는 데도 철저한 분업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판하본을 목판에 붙여 말린 뒤 판각할 때 초보자는 목판의 넓은 여백을 먼저 판각하고 조금 숙달된 각수가 그 다음과 정인 글자의 면을 판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문 각수가 세밀한 글자체들을 판각하며 마무리 작업을 했을 가능성도 크다. 이처럼 작업했던 각수가 그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들의 이름이 많이 보이는 「종경록」은 바로 고려대장경의 각수첩이다.
이들 각수가 하루에 새길 수 있는 글자는 얼마나 될까? 해인사 아래 마을에서 해인공방을 열고 있는 인준영 씨와 함께 판각 작업을 해본 적이 있다. 기존에 알려지기로는 하루에 스물여 자를 새길 수 있다고 한다. 안준영 씨가 실제로 새벽 예불과 공양 시간 그리고 하루 여덟 시간 잠을 자고 판각한 글자수는 무려 서른여 자에 달했다. 하루에 십여 자를 더 새길 수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그는 정신을 몰두해서 하루에 새길 수 있 는글자의 수는 쉰여 자까지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전란의 와중에서 고려의 각수들이 불집으로 새길 수 있는 글자도 쉰여 자 정도까지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글자를 새겼을지도 모른다. 한자한자 마음을 가다듬고 새겨 나갔다면 말이다.
그럼 고려의 각수 최동은 그 당시 어떠하였을까? 대장경판을 판각하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세운 서원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어떻게 생활하며 하루에 몇 글자의 경을 새겨 나갔을까? 그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다.
최동은 바로 남해분사대장도감의 간기가 나와 있는 「종경록」권27과 44를 판각한 각수다. 그는 간기 끝자리에 자신을 최동이라 새겼으며 남해라는 구체적인 지명을 밝혀 놓았다. 만일 남해의 지명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면 남해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드러나지 않었을 것이다. 최동, 그는 남해라는 지명을 왜 새겨 넣었던 것일까? 그것도 단두장의 경판에만 새겨 넣었던 것일까? 그 당시 「종경록」을 판각하면서 그는 분사대장도감의 위치를 밝혀놓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설후 그렇지 않더라도 칠백육십 년 전 각수 최동에 의해 우리는 고려대장경의 새로운 실마리를 잡게 된 셈이다. 그런 고려국의 각수 최동은 몇 살이나 된 총각이었을까? 그의 고향은 어디였으며 언제부터 고려대장경 판각에 참여했을까? 그러나 최동이 몇 살이고 어느 마을에 살았던 사람이며 그 신분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최동은 누구인가?
고려대장경의 조성 주체인 각수들의 성분과 그 성격을 밝혀 내는 일은 고려대장경에 얽힌 의문을 하나씩 풀어줄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지금 밝혀진 고려대장경 판각에 참여한 각수는 모두 삼천육백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들 모두가 고려대장경을 판각한 각수 전체의 숫자는 물론 아니다. 고려대장경 판각에 동원된 전체 인원을 파악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대장경 목판과 목판인경본을 대조하여 밝혀진 인원만 해도 삼천육백여 명에 이른다.
「방광반야경」 같은 경우 18권을 판각하는데 무려 백스물세 명의 각수가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 사람이 2~3권에 나타난 경우도 있다. 초기 판각 시에는 최소한 사, 오백 명 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럼 고려대장경은 남해분사대장도검에서 전량 판각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대장경 판각장소에 대해서는 또 다른 학설이 었다. 영남대 김윤곤 박사는 오랫동안 각수의 성분 분석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고려대장경의 의문을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다.
방대한 양의 고려대장경을 판각하기 위해서는 여러 곳의 분사대장도감을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강화, 진주, 남해 등 여러 곳이다. 그런 그는 최근 해인사에서도 고려대장경을 판각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그 단서를 찾고 있는 중이다.
고려대장경은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모셔져 내려오고 있다. 그 법보전과 수디리장 사이의 동쪽과 서쪽에 사간고라는 장경각이 있다. 이 곳에는 해인사에서 판각하거나 전해져 오는 경판들이 폐판들과 뒤섞여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김용곤 박사는 이 사간고에서 폐판들을 조사했다. 이 곳에 고려대장경의 폐판들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온 경판이 있었다. 그 경핀은 다름 아닌 「금강명경」판과 「대승대교왕경」판이다. 「금강명경」판은 1937년 최범술 선쟁이 일찍이 조사했던 것인데 숙종 때 판각한 초판본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 그 「금강명경」판은 고려대장경 국간판본의 특징인 열네 줄로 판각되어 있는 폐판본이었다. 이외에도 「천발천수경」은 10권도 조사해 보았는데 무려 백칠십여섯군데나 틀려 있는 폐판이 오늘까지 그대로 해인사의 사간고에 전해 오고 있다.
이 「천발천수경」의 간기를 보면 2권과 7권은 대장도감판이고 10권은 분사대장도감판이다. 어떻게 고려대장경의 폐판본들이 해인사의 사간고에 전해 내려온 것일까? 고려대장경을 강화에서 이운해 해인사에 모셔 오면서 폐판본들도 함께 왔을리는 만무하다. 혹 해인사에서 고려대장경을 판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해인사의 각수들과 판각 시설을 고려 당시 그대로 이용해서 대장경을 판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에 대한 연구와 조사는 앞으로 계속되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요즘 김윤곤 박사는 성균관대학에서 보존중인 해인사 사간판 인경본과 목판을 대조해 이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겨울철에 해인사의 경판을 한 장씩 찾아보는 것은 혹 경판을 상하게 할 우려가 있어 경판을 한장씩 뒤적여 가며 대조해 나가는 작업은 손을 놓고 있다. 그런데 이 분의 연구가 어디 혼자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인가. 해인사의 사간고도 고려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법보전이나 수다라장처럼 정리되고 목록 작성이 뒤따라야 되지 않을까. 사간고의 폐판본이라도 우리에게는 귀중한 사료가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고려대장경 조성 때에 고려의 각수들이 한마음 불심으로 판각했던 것처럼 고려대장경의 연구도 우리 모두씩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이루어질 수 있다.
고려대장경의 조성 주체가 누구인지, 고려의 각수 최동이 누구인지? 그 한사람의 각수신분이 확인되면 일일이 족보를 뒤져 가며 그의 존재가 밝혀져야 한다. 역사 속에 익명으로 묻혀 있는 각수가 아니라 역사 속에 살아있는 인물로 재조명 되어져야 한다.
최동 그는 누구인가?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