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되고 내가 열일곱이던 해 겨울, 어머니를 모시고 조그마한 절에 가게 되었다. 계룡산 서쪽 대처승들이 살고 있는 절이었는데, 마침 그 날 절에 와 있던 처사 서너 명이 방에 둘러앉아 이런 소리를 주고 받았다.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 일조진一早塵이라’
‘삼 일 동안 마음을 닦는 것은 천년의 보배이고, 백 년 동안 애써 재물을 모은다 해도 그것은 하루 아침 티끌이라’
동자숭 둘을 집안으로 맞아들인 어머니의 태몽 때문이었을까. 그 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마음을 닦는 일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 길로 출가를 결심했으나 지금이나 그 때나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으므로 누구한테 물어보지도 못하고 하루 이틀 미루게 되었다. 순천 선암사에 아는 스님이 있었으나 공주 반포면에서 태어나 백 리 바깥을 안나가보고 살았던지라 그 곳이 굉장히 먼 곳으로 생각되어 찾아갈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고 천수경이며 염불을 나름대로 외우며 집에서 지냈다. 주변에 보면 재물도 있고 잘 살아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도 속 얘기를 들어보면 그게 아니었다. 그런 저런 것들을 보면서 세속에 살고 싶은 생각이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반 절집생활을 하며 몇 년을 지내다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모시고 갑사 근처에 들르게 되었는데, 마침 선암사스님이 계룡산으로 오셨다는 소문을 뚫었는지라 물어물어 그 분을 찾아간 곳이 갑사 위 중사자암이었다.
절은 이주 자그마했으나 고즈넉해보였다. 도착하니 점심 공양 때였다. 스님 두 분과 보살, 처사 그리고 나 대여섯이 바루공양으로 점심을 먹게 되었다. 큰 바가지에 소담스레 담겨 있는 밥을 뜨고 한두 가지 찬을 다른 한 바루에 담고 청수물도 받고하며 제대로 격식을 갖추고 공양을 했다. 시작과 끝을 알리는 죽비소리만 들릴 뿐 침묵으로 일관하며 밥을 다 먹은 다음 수건으로 바루를 돌려가며 윤이 나도록 닦아 넣어 두는 것으로 공양이 끝났는데, 오랜 내 숙겹의 인연 탓이었을게다. 수건으로 부드럽게 바루를 닦아내던 그 손놀림이 그리도 친숙하게 다가왔던 것은. 난생 처음으로 해본 바루 공양이 왜 그리 가슴 서늘토록 좋던지, 그 날 온몸으로 퍼져오르던 환희섬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렇게 공양을 끝내고 선암사에서 오신 스님께 여쭈었다.
“삼동을 같이 지낼수 있습니까.”
스님은 그러라 했고, 기왕이면 시월 보름 전에 오라고 했다. 결제 전에 오라는 소리였을 것이다.
집에 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했던 형님과 어머니께 삼동을 절에 가 지내겠다고 말씀드리니 쾌히 허락을 했다. 음력 시월 여드렛날 다시 중사자암으로 와 있으려니 사람들이 수런수런댔다.
‘며칠 있으면 호랑이 스님 온다’ 고. 열사흘 날 마치 산달마처럼 생긴 스님 한 분이 오셨는데, 내 은사 스님이 된 금오金烏스님이었다. 그 해 시월 보름, 여나은 명의 스님들이 금오스님을 조실 스님으로 모시고 결제에 들었다.
식구도 많지 않으니 행자라고는 나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머리를 땋거나 기른 적이 없으니 삭발할 머리도 없었고 절에서 내 준 헌 옷을 입고 공양간에 들어가는 것으로 행자생활이 시작되었다. 살림이 궁하던 시절이라 공양간에 솥하나 덜렁 걸려 있었는데, 물을 데워 밥하고 설겆이 하려고 하면 부전 스님이 청소한다고 다써버려 엄동설한에도 늘 뺏속까지 스며드는 찬물에 손을 담그고 설겆이를 해야 했다. 그래도 네 해를 벼르고 별러 출가를 해서 그랬는지 고생이라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들지 않았다. 밥하고 국 끓이고 나무를 하는 생활이었으나 마음은 언제나 즐거움으로 차 있었다. 꽤 고단해서였는지 날마다 코피를 쏟았으나 새벽 도량석을 돌 때면 늘 환희심으로 발걸음이 가벼웠다.
내 은사스님은 건강이 퍽 좋은 분으로 용맹정진 하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스님께서 대중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도를 닦는 데 가장 큰 마구니는 잠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니 수마 항복받는 것만도 어딘가’
그래서 스님께서 내 놓은 의견은 한 사람을 가운데 앉혀 놓고 나머지는 그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잠을 자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실행은 못했으나 근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스님은 늘. “중은 모름지기 선방에서 참선 정진해야 한다. 글부터 배우면 사람 버린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듯 손수 정진에 모범을 보이며 무서울 정도로 대중들을 경책한 분이었으나 마음씀이 섬세한 구석도 있었다. 어느날 우체부가 배달한 소포를 받고 누군가가 소포를 싼 끈을 가위로 끊으려고 하자 그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던 기억이 난다.
‘끊지 말고 풀어라. 그렇게 툭 끊어 버릇하면 마음도 그렇게 된다. 맺힌 것은 풀어야 하느니라.’
그러면서 스님은 물건을 싸서 묶는 데도 꼭 골을 내어 풀기 쉽도록 했다. 끈이 짧더라도 꼭 골올 내게했는데, 출가해 쉰 해 가까이 되는 나도 그 때부터 지금까지 누가 무엇이든 풀지 않고 끊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안 되었다. 물론 지금까지 물건을 묶을 땐 꼭 골을내어 놓는다.
출가 전 ‘보통 복으로는 중 되기 어렵다’ 는 얘기를 들은 터라, 출가를 하면서도 ‘나는 복이 없으니 출가해 부목을 하던지 염불을 열심히 해 다음 생에나 좋은 몸 받아 출가해야겠다’ 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계를 받는 것에 마음을 크게 쓰지 않고 있는데 울산에서 행자 하나가 올라와 계를 받게 되어 나도 함께 금오스님을 은자스님으로 계를 받았다. 삼동 한철을 잘보내고 난다음해 봄이었다.
머리 깎고 중되면 다부처되고 극락간다고 하지만 옛 어른들 말씀, ‘중 아니면 팔반사천 지옥 다 채울 수 없다’ 는 말도 있듯, 시주한 것 가지고 살면서 공부 안하면 어디로 갈것인가. 오직 출가자가 할 일은 정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출가에의 첫 발을 내딛는 행자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계행을 철저히 지키고 열심히 정진하라’ 고 이른다. 무릇 출가자란 마음을 깨달아 생사해탈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지만 계행을 지키지 않고는 공부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한다.
또한 염불을 열심히 외우라고 하는데, 염불하려 출가한 것은 아니나 염불은 출가자의 필수이므로 열심히 하라고 한다. 열심히 염불하고 기도하면 평소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되고 생각이 정리된다. 너그러워지고 용서하게 되고 지혜 또한 생겨나니, 그저 나는 행자들에게 열심히 염불하라고 이를 뿐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