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려고 하니 보인다. 점심 무렵, 도시 외곽을 지나는데 빈 속의 허기는 음식점들만 잦게 눈에 들인다. 간판도 요란하고 규모도 예사롭지 않은 밥집들이 길가에 즐비하다. 불경기라는데도 눈에 띄는 곳마다 먹을 것 치레할 것 투성이다. 점심點心, 점 찍을 마음은 잊혀지고 허기진 육신만 느껴진다. 화암사터, 오래 전, 육신이 제아무리 풍성해도 가셔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 그 헛헛함에 사무치던 이들이 찾았을 절로 가는길.
의정부를 지나서 동두천으로 향하는 길, 회천읍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덕정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난 길로 꺾어져 한동안 가다보면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보인다. 천보산이다. 그 산을 멀찌감치 끼고 도는 길가에 회암사라고 쓰인 작은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 옆 담벼락에 붙은 때 절은 플래카드 하나가 얼핏 눈에 잡힌다. “양주군의 자존심 회암사를 복원하자” 회천청년회에서 내건 플래카드다. 결심이 다부지면 말이 필요없으련만, 처음의 오달진 다짐이 스스로 못미더워 두고두고 새기려 내걸었으리라. 초발심의 순정함으로 하얗을 천은 비바람과 먼지, 지나가는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에 찌들대로 찌들어, 양주군의 지존심은 커녕 제 자존심조차 닳아 버린 채 누추하다.
플래카드가 붙은 담벼락을 끼고 차 한 대가 지날만한 길로 들어서 가다보면, 마주보이는 산기슭에 널따란 빈터가 펼쳐진다. 빈터 어귀의 안내문이며 괘불지주와 당간지주로 절터임을 미루어 짐작할 뿐, 관리소 명목으로 들인 외딴집 개 두 마리가 낯선 발짝 소리에 짖는 소리가 요란스러운, 거칠 것 없는 빈터이다. 갈변한 겨울산을 배경으로 산 어귀에 소나무와 전나무가 성글게 숲을 이루고, 길 쪽으로 내려오면서 마른 풀이 지천이다. 그 사이사이에 널린 주춧돌 위로 겨울 오후의 볕이 나직하게 내린다. 여말선초, 지공, 나옹, 무학 삼대 증명 법사의 원력이 깃들고 한때는 삼천 승려가 화두를 들고 참구했다던 큰 절 회암사터 어귀, 빈터의 막막함에 문득 뒤돌아보면 삼각산 봉우리가 저만큼 보인다. 지금은 절터 바로 앞 레미콘 공장에서 쌓아놓은 모래더미를 함께 눈에 담고서야 바라보이는 저 봉우리는 육백 년쯤 전, 밤낮 없이 화두를 붙들던 어느 스님이 문득 눈들어 시린 하늘을 쓸어 담으며 올려보았을 때에도 저 모습 그대로였을 것이다.
회암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328년, 인도에서 원나리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스님이 창건했다고도 전해지지만, l 174년에 금나라사신이 이 절에 다녀갔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림에 남은 걸로 보아 지공스님이 오기 이전에 절이 있었던 걸로 여겨진다.
동북인도에서 태어난 지공스님은 여덟 살 때 인도의 나란다사那蘭院寺에서 출가한다. 나란다사는 그 당시 세계적으로 유서 깊은사원이자 대학이었는데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기울었으니, 지공스님은 나란다 대학의 마지막 졸업생이 되는 셈이다. 남인도 능가국 길상산의 107대 조사 보명스님에게서 법통을 이어받아 108대 조사가 된 지공스님은 뒷날 중국과 고려에 머물면서 두나라의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고려에 머문 기간은 이년 반이지만, 사십 년 동안 머문 중국에서보다 오히려 더 많은 자취를 남긴다. 회암사에 온 지공스님은 나란다사와 입지가 비슷한 회암사를 중창해서 나란다사의 후선으로 키우려 했고, 그 소임을 마친 이가 나옹 혜근스님이다.
친구의 죽음을 보고 ‘삼계를 벗어나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출가한 나옹스님은 세수 이십사세에 회암사에 이르러 사 년 동안의 용맹정진 끝에 대오한다. 그뒤 원나라에 간 나웅스님은 법원사에서 주석하던 지공스님을 만나 법을 이어받고 다시 임제종의 종통을 이은 평산 처림스님에게서 인가받는다. 중국에서 십여 년만에 고려로 돌아올 때 나옹스님은 지공스님을 찾아가 묻는다. “이제 제 자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 때 지공 화상이 수기를 내린 곳이 ‘삼산양수三山兩水 사이’즉 회암사이다. 회암사를 불법이 절로 중흥할 길지로 택했던 지공스님이 입적한뒤, 사도 달예司徒達睿가 스님의 영골과 사리를 받들고 회암사로 왔고, 나옹스님은 탑을 세워 모신다. 1374년, 송광사에 머무르던 나옹스님은 회암사로 돌아와 가람 중창 불사를 일으킨다. 이백여든 두 칸의 대가람을 중창한 낙성법회에는 사부 대중이 ‘구름과 바퀴살’처럼 모여든다. 이를 경계한 조정 대신들의 종용으로 우왕은 나옹 스님에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밀양 영원사로 떠나라는 영을 내린다. 영원사로 가는 도중 여주의 신록사에서 입적한 나옹스님의 유골은 회암사로 운구된다. 생시에도 남다른 신통력을 보였던 나옹 스님의 유골을 뱃길로 운구할 때, 가뭄으로 배를 띄울 수 없을 만큼 말라붙은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는 기적이 일기도 한다.
“지붕이 연달아 뻗쳤고 툇마루가 덩굴처럼 연결되어 돌아 있으며 높고 아득한 것이 동서를 잘 분간할 수 없다. 불전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승료는 다 미치지 못하였고 혹 종루는 수보했으나 객실에는 미치지 못하여 동쪽을 수치하자 서쪽이 벌써 기울고 남쪽을 고치노라면 북쪽이 더 상했으니 대저 절이 큰 까닭에 일이 거창하고, 일이 거창한 까닭에 사람이 능히 짓고 다 잇지 못하며, 드디어 온 나라에서 큰 절간은 거의 빈집이 되다시피 하였다.”
고려말 이색이 회암사수조기格嚴寺修造記에 남긴 글이다. 그 규모를 감당할수 없을 만큼 커서 오히려 황폐해졌다는 가르침을 남긴 회암사는,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태조의 왕사인 무학 자초스님이 주석하여 왕실의 지원을 받는 큰절이었다. 태조 때에는 사원전寺院田 오백 결에 이르러, 나라 안에서 살림이 가장 넉넉한 절이 된다. 공양왕과 왕족의 후예를 모두 살해하고 나라를 세운 태조는 자식들의 골육상쟁을 겪고 왕위를 몰려준다. 그 뒤 명산을 찾아다니며 무참하게 죽어간 고혼들을 천도하는 일로 과보를 참회하던 태조는 무학스님이 있는 회암사로 와서 머무른다. 태조가 머무른 회암사에 태종의 발걸음이 잦아지자, 정무를 총괄하던 의정부議政府가 지금의 의정부까지 따라와 지명으로 정착되기도 한다. 세조 때에는 세조비인 정회왕후가 십삼 개월에 걸쳐서 회암사를 중수했고, 명종 때에 이르러 문정왕후가 불교재흥 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이 된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고 억불정책으로 돌아서자 절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는다. 명당 터라는 말에 현혹된 흥선 대원군의 후손은 대원군의 묘를 회암사터에 썼다가 이장하기도 한다. 해방 이후, 운현궁 측은 절터를 한 학교 재단에 넘겨 그 학교 창립자의 묘소가 절터 안에 자리잡고 있다.
회암사터는 삼각산을 마주보는 평지에서 산이 있는 쪽으로 다가갈수록 완만하게 높아지고 좁아지는 부채꼴 모양이다. 지형의 둥고차를 구획하여 동서를 가로질러 여덟 단의 축단을 쌓아올려 가며 대지를 조성했다. 아래 쪽은 최근까지도 씨를 뿌리고 거둬들이던 경작지로 쓰여서 비교적 평평하다. 세번째 단지 동편에는 고루庫樓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저만한 화강암을 캐어내는 것도, 정으로 돌을 쪼개 다듬어 내는 일도, 그걸 옮기는 데에도 어지간한 공력이 들었겠다 싶은 큼지막한 수조는 온전히 남아 있고, 그 곁 절반 깨어진 채 비스듬한 작은 수조가 놓여 있다. 고루 동편에는 화강암 맷돌이 두 개 남아 있다.
축단과 축단 사이, 마른 잡풀 사이로 화강앙 주춧돌이 더러는 흐트러지고 더러는 건물의 모양을 선연히 어림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하게 드러난다. 어떤 주춧돌은 재단 측 관리인이 사는 집 앞마당 구실을 해 빨래 너는 바지랑대를 받치고 있기도 하고 아예 드러나서 걸터앉기 맞춤한 것도 있다. 하기야 이 곳은 지금, 절터를 사들인 재단의 교직원들이 이따금 야유회를 하러 오는 곳일뿐더러, 한가로운 빈터 사이로 소나무와 전나무 몇 그루가 드리우는 그늘을 탐한 젊은사람들이 야영을 했으면 하고 탐내는 땅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이 곳은 산기슭에 석축 담장까지 둘러 야늑한 곳, 늘 바쁜 마음을 소쇄한 바람결에 잠시 풀어놓기 알맞은 곳으로 여겨질 법도 하다.
그 빈터를 거슬러 올라가면 맨 윗단 동쪽 끝, 세찬 물살에 움푹 패인 고랑이 시작되는 곳에 회암사 지 부도탑이라 이름지어진 부도가 있다. 조선시대 보우스님의 부도라고도 하고 그 이전부터 있었다고도 전해지는 부도탑이다. 허물어진 절도 절이니 부처님을 모셔야 한다는 어느 소박한 마음이 그랬을까. 상대석에 조악하게 조성된 불상을 모셔놓았다. 윗입술이 뾰루둥한 그 부처님, 아무리 뵈어도 심기가 편치 않으신 것 같다.
회암사를 일으키고 지탱했던 삼대 화상의 자취를 찾으려면 명지에서 산으로 오백 미터쯤 올라간 곳에 있는 새절 회암사에 올라야 한다. 봉선사의 말사인 새절 회암사는 l821년. 경기 지방의 스님들이 삼대 화상의 부도와 비를 중수하면서 지은 조촐한 절이다. 절 서북쪽 산마루엔 이색이 짓고 권중화가 비문을 쓴 회암사지 선각왕사비가 있다. 음각된 비문은 닳아서 알아보기 힘들다. 동편 산등성이 언덕받이엔 지공, 나옹, 무학 삼대 화상의 부도와 석등이 남북으로 열을 지어 있다. 스승인 지공스님이 열반하시던 날, 왔어도 온 것이 없으니 밝은 달 그림자가 강물마다 나타난 것 같고, 갔어도 간 곳 없으니 맑은 허공의 형상이 모든 세계에 나누어진 것 같다. 말해 보라. 지공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말씀하고 뒷날 영골을 받들어 탑에 모신 나옹스님, 나옹은 대체 어디 있는가. 부도탑의 돌지붕, 무정 위에 세월이 피운 꽃무늬가 유정하다.
삼각산 봉우리를 향해 해가 자꾸만 낮아진다. 빈터를 덮은 담배나물, 파슬파슬 마른 채 꽃받침에 위태롭게 매달린 홀씨같은 꽃더미를 바람이 한번 쓸고 지나간다. 어디서 생겨나 어디서 멸하는 바람인가 알지 못한 채 담배나물꽃은 오시시 흔들리며 환하게 빛난다. 비질 자국 선명한 절마당에 깔리던 별이 저랬을까. 가만히 귀기울이면 몇 백 년 전의 소리 죽인 발짝 소리나 은은히 진동하는 범종 소리가 들릴 듯해 귀를 모두는데, 난데없이 허공이 울린다. 욕계와 객계 무색계로 번져나가는 범종 소리가 아니라 절터 바로 옆에 들어선 군부대에서 국기 강하식을 하는 것이다.
보려고 하니 조금 보인다. 망루 위의 군인이 먼산에 눈을 준 채 총을 아령삼아 팔운동을 하며 시간을 견디는 곁으로 돌아나오는 길, 그러고 보니 이 길은, 니웅스님이 영원사를 향해 떠난 길이다. 그 때, 타고 나오던 가마를 되돌려 다시 열반문을 지나게 한 나옹스님, 다시 못 올 이 길을 지날때 그 마음에 무엇이 비쳤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