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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내음 짙었던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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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송재소 1997년 02월 180호
우리나라의 명절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설과 추석이다. 중국사람들은 단오절도 설과 추석 못지 않은 명절로 친다. 날씨가 더운 남쪽지방에서 특히 단오절을 중요시하는데, 대만에서는 지금도 단오절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음력 5월이 매우 무더워서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기 쉽기 때문에 질병으로부터 오는 재앙을 미리 대비한다는 뜻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옛 중국 사람들은 5월을 ‘오월惡月 (미운달)’ 이라 하여 매우 싫어했는데, 오五와 악惡의 음이 같은 데에서 나온 말이다.
단오절인 5월 5일은 특히 불길한 날로 여겨서 이 날 태어나는 아기를 모두 버리고 기르지 않았다는 지방도 있다.
우리나라와 같은 기후에서 단오절이 명절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껏해야 여자들이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 정도였으나 지금은 창포도 삼푸에 지리를 내어 주고 말았다.
뭐니뭐니 해도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은 설날이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이란 말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이 있을 수 없다. 설날이란 이렇게 엄숙하고 뜻깊은 날이지만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설날은 ‘먹을 것이 많은 날’이었고 그래서 즐거운 날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들 가난한 때였다. 내가 태어난 해가 1943년이었으니 해방전후의 혹독한 가난은 모르고 지냈다 하더라도 육이오를 겪으면서 당한 시련은 참으로 커다란 고통이었다. 그 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가난하기 때문에 받는 기장 큰 고통은 먹는 것이었다. 보리가 반 이상섞인 밥에다 김치, 된장, 간장과 몇 가지 나물반찬이 상차림의 전부였다. 어쩌다 김이라도 놓이면 어른들 눈치보느라 한두장 얻어 먹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소금에 절여 소태같어 짠 고등어 살점을 맛보는 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보리 섞인 밥이나마 매끼니 먹을 수있는 것이 아니다. 아침밥을 제외한 점심, 저녁은 국수나 수제비 또는 멀건 콩죽이 단골 먹거리였다. 삶은 고구마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었다. 그 때는 정말이지 고깃국에다 하얀 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국수 먹고 싶다’고 하면 어머니는 ‘밥이 있는데 왜 국수를 먹느냐” 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신다. 아마 가난한 시절, 국수로 배를 채우던 쓰라린 기억이 가슴에 사무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일 년 중에서 제일 기다려지는 날이 제삿날과 명절날이었다. 이 날은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설날에는 먹을 것이 주위에 널려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가래먹을 참기름 친 간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콩강정, 깨강정, 유과를 네모 반듯하게 자르고 난 부스러기만 얻어 먹어도 배가 불렀다. 지글지글 전 부치는 소리와 떡치는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신명이 났다. 할아버지가 벽장 속에 감추어 둔 꽂감을 넉넉하게 맛볼수 있는 날도 바로 이 날이었다.
군것질 거리가 많지 않았던 그 시절에 가장 달고 맛있는 것이 감과 엿이었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조그마한 집을 마련했을 때, 넓지 않은 마당에 가장 먼저 감나무와 대추나무를 심었다. 어릴때 먹었던 그 맛을 잊지 못해서였다. 봄에 싹어 나서 꽃이 피고 가을에 열매가 맺히는 자연의 신비를 바라보는 즐거움도 즐거움이려니와 그것을 따서 먹는 재미는 그 무엇에도 비길 수가 없다. 올해에도 감 대여섯 접을 따서 마당가 장독 속에 넣어 두고 겨울내내 꺼내 먹을 참이다. 그런데 집의 아이들은 집에서 수확한 감, 대추, 살구 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맛있게 먹는 나를 보고 그런 걸 왜 먹느냐’ 는 눈치이다. 하기야 감이나 대추보다 더 달고 더 맛있는 과자가 얼마든지 있으니 그렇게 여기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다. 육이오 직후, 단 것이 먹고 싶어서 가게에서 사카린을 사가지고-그 때에는 사카린을 봉지에 넣어 팔았다.-손바닥에 쏟아 혀로 햝아 먹었던 내 어린 시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든다.
먹는 것 말고 기억에 남는 일은, 섣달 그믐날 밤의 수세守歲와 정월 초하룻날 밤의 신발 감추기이다. 섣달 그믐날 밤에는 집안 곳곳에 밤새도록 불을 밝혔다. 안방, 사랑방은 물론이고 부엌과 변소에까지 불을 켜 놓아 새해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 날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고 했다. 어렸을 때는 이 말을 믿고 감기는 눈을 부비며 잠을 쫓으려 했지만 결국은 꾸벅꾸벅 졸다가 잠을 자게 마련이다. 이튿날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정말로 눈썹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어른들이 눈썹에다 밀가루를 뿌린 것이었다. 철이 들어서는 그런 걸 믿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의 그믐날에는 정말 자지 않고 밤을 새우면서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었거라」를 독파했던 기억이 난다.
정월 초하룻날 밤에는 야광夜光 귀신이 인가에 내려와 이이들의 신을 신어보고 발이 맞으면 신고 가버린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면 신을 잃은 아이는 일 년 내내 불행한 일을 겪는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신을 감추고 불을 끄고 잠을 갔다. 일 년에 한번 설날에 새 신을 신어 보는 것이 그무렵 실정이었다. 새 신이라야 검정색 헝겊으로 만든 보잘 것 없는 운동화였지만 아이들에게는 여간 소중한 물건이 아니었다. 평소에 검정 고무신만 신다가 기벼운 운동화가 생겼으니 애지중지 할 만도 했을 것이다. 내 기억으로도 이버지에게 운동화를 선물 받은 날은 잠을 설칠만큼 기뻤다. 며칠을 방안에 모셔두었다가 설날에야 처음 신어보는 것인데 귀신이 신고 가버린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야광귀신 이야기는 그토록 가난했던 시절과 딱 맞아떨어지는 풍속이었다. 요즈음 이런 얘기를 믿을 아이는 이무도 없을 것이다. “도둑 맞으면 또사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그 시절이 사람 냄새가 나는 때였다. 눈썹이 셀까봐서, 새 신을 도둑맞을까 봐서 마음졸이며 맞는 제석除夕과 원일元日 이지만, 누구의 눈썹도 세지 않고 누구의 신발도 없어지지 않았던 즐거운 그 시절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