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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 눈짓깨비 그리고 가루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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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백기완 1997년 02월 180호
노동자 총파업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은 웬일인지 가루눈이 날린다.
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이제껏 내 머리 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 내 어릴 적 기억에 따를 것이면 해마다 섣달 그믐 이맘때쯤 되던 내 옛살나비(고향) 구월산 밑엔 거의 약속이라도 한듯 매서운 기루눈발이 휘날리곤 했다. 이득한 높새로부터 다그치는 눈발에 소나무 가지는 마치 찢어진 장수의 가슴처럼 울고 그 모진 추위에도 수십리 떨어진 바닷가 아낙네들이 생선 소쿠리를 잔뜩 이고 범이 나오는 내 옛살나비 그 유명한 멍우리 패를 넘어 와서는 이집 저집 하얀 발자국을 새기며 좁쌀 알이나 바꿔 다시 그 멍우리 고개를 넘어갈 적에는 도재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느닷없이 달겨드는 범을 쫓느라 반드시 햇불을 밝혀 드는데 그럴 적마다 어찌나 눈발이 거세든지 그 햇불마저 금세 뽀얗게 파묻어 버리는 그런 눈보라가 그렇게 드세곤 했다.
그리되면 얼어붙은 논바닥 끝이 없는 논바닥에서 팽이 치던 아해들도 하나씩 둘씩 다 돌아가고 그 허허 벌판에 남는 건 나혼자였다.
그 때마다 나는 내 어린 등때기에 땀이 배이도록 팽이채를 들어 팽이를 아주 야무지게 내려치곤 했다.
왜냐? 저 멀리 동네 한복판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떡치는 소리를 잊고저 했기 때문이다. 그 때만 해도 입쌀이란 왜놈들이 다 뺏어가 설빔이랍시고 떡을 한다고 해 보았자 기껏 조차떡이 아니면 수수떡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나마 우리집엔 그런 설빔마저 하질 못했으니 어린 내가 들어갈 곳이 어디란 말인가.
그래서 그 허허 들판에 홀로 남아 팽이만 치는데 요즈음 애들은 잘 모르거니와 그 때 팽이라고 하면 거의가 소나무로 깎은 것인데 그 가운데서도 관솔이 올돌처럼 박힌 팽이는 때리면 윙~ 또 때리면 조금 더 소리 높혀 윙~ 거푸 때리면 윙~윙~ 마치 시퍼렇게 낫을 갈아들고 일어나는 머슴놈의 노여움처럼 울었다. 어린 나는 그 소리가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그런데 관솔줄이 머슴놈 종아리에 피멍처럼 박힌 팽이는 때릴수록 위세높은 큰 기와집 서까래가 느닷없이 무너져 내리는듯 왕~왕~ 울었다.
아니 설빔을 한다고 떠들썩한 집 대들보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때릴 수록 허기진 나를 그렇게 즐겁게 해 줄수가 없었지만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한 팽이 소리는 아무리 패도 몸통이 온통 관솔로 된 그놈의 소리였다.
이것은 내 칼질이 못 미쳐 나보다 여섯 살 위인 형님이 깎아 준 것인데 그 놈의 몸에다 팽이채 노끈을 야무지게 감았다가 세차게 얼음판에 내동댕이 치는 것과 때를 같이해 냅다 채를 당기면 팽이 밑두리에 맴이 먹혀 첫판부터 웅~ 하고 묵직하게 소리를 낸다. 이 때 팽이가 기울세라 팽이채를 하늘로 치켜 올렸다가 내리치고 또 내려치면 웅~웅~ 마치 들판의 메마른 풀나무들이 온통 한꺼번에 떨쳐 일어나 거센 눈보라로 하여 하늘과 들판이 시퍼렇게 내려앉은 어두움을 뚫고 나아가는 무지랭이들의 떼 소리 같았다.
그 소리를 쇳소리라 하거니와 나는 그 소리가 그렇게 좋았다. 그래서 내려치곤 하던 내 어린 날…
그러나 그렇게 해서 떡치는 소리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도 잠깐, 외양간의 소들도 고뿔 들세라 덕석을 등에 지고 세월을 넘나들 듯 새김질에 저녁이 짙어 가면 왜그리 서글퍼지든지 난 한달음에 대문을 박차며
“엄마이 우리집은 떡 안 하네! 우리도 좀 하라우...”
어머니 치마폭에 몸을 던지면 삯바느질을 하던 어머니가 들려 주던 눈에 얽힌 이야기이다.

기완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면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 온지를 아느냐.
함박눈이 펑펑 지양없이 쏟아져 길이 막히고 산이 막히고 강물이 막히면 그동안 시집 못 간 가시나(처녀)가 안방에서부터 치맛바람을 일으킨다고 했단다. 그리히면 산짐승도 날짐승도 모두 가로막힌 저 언덕, 그 언덕을 뚫고 누군가가 달려 오는데 누가오느냐 그렇게도 목메이게 기다려던 님, 산사람이 온다고 했다.
결국 함박눈이 오는 날은 님이 오는 소식! 다시 말하면 시집 못가던 처녀가 시집을 가게 되는 날이라 그랬구나.
기완아, 그런데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아니고 한 치 앞을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눈짓깨비가 휘날리면 또 어떤일이 생긴다고 그랬는지 아느냐. 눈짓깨비는 하염없이 쏟아질수록 세상은 한낮부터 밤이 내리고 그리하여 진작부터 밤이 깊어지면 세상은 온통 꽁꽁 얼어붙는 법이다.
길도 얼어붙고 들판도 얼어붙고 산도 얼어붙어 깅물도 얼어붙고 하늘도 얼어붙고 물론 장독도 얼어붙고 우물마저 얼어붙어 모두 동태가 되는데 오로지 얼어붙지 않는 것이 하나 있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사랑방 머슴놈의 아랫도리 배알튀(배창자)란다.
모두가 얼어 붙어도 노여움에 겨운 이 놈만은 벌걱 일어선다고 했다. 그리하여 모두가 깊은 잠에 곤두박혀도 활활 달아올라 얼어 붙은 구들골을 쿵쿵 가르노라면 저 멀리 얼어붙은 산비탈에서부터 도란도란 불빛을 내던 화전민의 딸 도랑내가 얼어 붙은 도랑을 깨고 얼어 붙은 산허리를 가르며 다가오나니 그래서 눈짓깨비가 그리 설치는 날엔 떠꺼머리 돌머슴이 장가를 간다고 했구나.
그런데 기완아, 오늘 오는 눈은 가루눈이지? 저것 보거라 저 휘몰아치는 눈발 그야말로 한 치 앞이 안 보이지? 그런데 말이다. 어째서 오늘 오는 눈발은 저렇게 한 치 앞이 안 보이도록 뽀얀 가루눈이 되어 내릴까.
이것 보거라. 이 네 에미 손, 손등이 쩍쩍 갈라졌지?
이와같이 손둥이 터지도록 날씨가 추우면 눈발도 저절로 얼어 터져 가루눈이 된단다.
그런데 말이다. 기완아, 저렇게 가루눈이 자꾸만 오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아래도 안 보이고 위도 안 보이고 앞도 안 보이고 뒤도 안 보이고 그리하여 산과 들도 파묻히고 안방도 파묻히고 손발도 파묻히고 마음도 파묻히게 된단다.
그런데도 그냥 이불이나 뒤집어 쓰고 앉아 있으면 어떻게 될까.
배만 고프다고 울고나 앉았으면 어떻게 될까. 눈물도 콧물도 핏줄마저 모두가 꽁꽁 파묻혀 결국 죽고마는 구나.
그러나 바로 이 때 그 배고픔을 참고 벌떡 일어나 저 가루눈발을 헤치며 밥을 찾아 아니 내일의 희망을 찾아나서게 되면 반드시 그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 바로 저 가루눈 눈보라란다.
그런데 기완아, 저렇게 험한 밤길을 맨손으로 나설 수야 없지 않겠니? 그래서 저 매서운 눈발을 마치 숫돌처럼 몸과 마음을 시퍼렇게 갈아쥐고 나서는데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는 줄 아느냐? 돌빔이라 그래왔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그 가루눈이 육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 내리고 있다. 묘한 우리네 정서의 손짓이 아닌가 여겨 본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