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시인 브레히트가 쓴 유명한 ‘책을 읽는 한 노동자의 물음’ 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역사는그 이름이 적힌 왕들이 아니라 익명의 노동자들에 의해 건설되어 왔음을 노래하는 시다. 그러나 마침내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이 되는 시대가 왔다. 오랜 투쟁을 거쳐 약자인 노동자는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권리를 확보하였다. 사용자와 대등한 인격을 가진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근대 국가의 헌법은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의 이른바 노동3권을 보장하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
한국의 현대사는 노동 탄압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노동3권이 유린되고 노동자들은 수난과 핍박을 당하였다. 한국 경제 발전은 바로 이 노동자들의 회생과 피땀이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네 누이의 피맺힌 손마디와 형제들의 무쇠 팔뚝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이제 그 권리를 보호해 줄 때도 되었건만 사용자와 그 영향 하에 있는 정부는 인색하기만 하다.
지난해 12월 26일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한 노동법은 바로 이러한 노동3권을 여전히 제약하고 있는 내용들로 차있다. 복수노조금지, 정리해고와 변형근로제, 대체근로 등이 모두 노동자의 권리를 본질적으로 훼손하고 있는 것들이다.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되어 노동자, 시용자, 공익측의 전문가들어 수개월에 걸쳐 논의하던 ‘노개위’ 안이 갑자기 사라지고 어느 날 정부가 기업의 입장만 대변하는 안을 만들어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켜 버렸다. 국제노동기구, OECD 한국이 가입한 국제기구가 정한 여러 기준에도 분명 어긋나는 노동법이었다.
노동자들어 일어설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두눈을 가만히 뜨고 밥그릇을 뺏기고 있을 리는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노동자들을 강경하게 탄압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명동성당에 농성중인 노동자들의 지도자를 강제로 연행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 진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지금껏 그러한 진압이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불편을 당한 시민들은 정작 노동자들을 원망하고 권력은 그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진압해 왔던 것이다. 전국적 파업과 교통 마비에도 국민은 노동자의 편을 들며 정부에 그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가하는 것이 선진국의 사례이다. 지난 1995년 프랑스의 ‘검은 화요일’을 불러왔던 총파업을 국민은 지지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이번 파업은 국민의 전반적 지지가 따르고 있다. 노동자들의 권리 의식도 한층 더 나아가있다.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20세기 말에 중세시대의 통치의식으로 해결하려는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