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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설을 발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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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성전 1997년 02월 180호
곧 우리의 설입니다. 한때는 설을 이중과세라 하여 ‘구정’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낡은 것이라는 이유로 폐기처분하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마도 경제적 효용의 극대화를 꾀한다는 이유에서였겠죠.
우리는 60년대와 70년대를 참 숨가쁘게 살아왔습니다. 설인데도 따뜻한 국 한 그릇 못 먹고 일터로 출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쓸쓸하게 지켜보던 아픈시간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 때는 온통 경제적인 구호일색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도 국민소득 얼마, 수출 얼마의 현수막이 우리의 시선을 무겁게 포박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새마을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러야 했고, 선진국을 향하여 우리 모두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어야 했습니다. 그때의 ‘희생’ 은 사회적으로 애국이라는 이념으로 우리를 강요해 왔습니다. 노동자, 농민, 군인 누구 할것 없이 국가권력이 외치고 추구하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모두 자신의 피와 땀과 생명까지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였겠지요. 우리는 물질적으로 썩 풍부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이런 사회에 오기까지 실로 노동자, 농민의 애국적인 희생이 있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들은 진정 이 땅의 발전의 역군이었음을 부인할수 없습니다.
어제는 명동성당 근처를 둘러보았습니다. 개정된 노동법을 둘러싸고 노동자와 전경이 대치된 그 일대에 돌조각과 유인물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보상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희생의 파편 같았습니다. 희생하고 생존권마저 위협받아야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분노와 슬픔을 함께 읽을수 있었습니다. 혹풍 아래서도 흔들리지 않고 결연하게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차리리 처연한 아픔이었습니다.
이제는 해결책이 나와야 합니다. 법 개정의 취지가 아무리 좋고 해도 어느 한 쪽이 생존권마저 위협 받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다시 개정되어야만 합니다. 고루 잘살고 고루 행복하지 않다면 발전과 소득 증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일부가 잘살고 일부가 행복하기 위한 발전 논리는 이제는 그쳐야만 합니다. 노동자, 이제 그들에게 다시 희생의 논리를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불황과 침체의 요인이 그들이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이 땅의 기업들이 어떻게 성장해 왔고, 이 나라 경제 발전의 주동인이 누구였는지를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조금은 거리가 먼 산승이 잠깐 지나쳐 온 명동성당의 노동자들은 무척 춥게 느껴졌습니다. 그들이 이번 설에 가족들과 따뜻한 떡국 한 그릇이라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들이 생존권의 벽에 막혀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가정에 남은 그들의 가족은 얼마나 쓸쓸한 설을 맞이하겠습니까.
이제 곧 설인데, 그들 모두가 가정에 돌아가 일터에 대한 근심없이 가족들과 둘리앉아 떡국 한그릇 마음놓고 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경도 없고 개정된 노동법도 없는 그 길 힘차게 걸어가 따뜻한 설 보낼 수 있기를 명동성당 곁을 지나며 발원했습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