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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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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1997년 01월 179호
서글픈 우스개

시시때때로 바뀌고 있는 사회상을 엿보는 잣대가 여럿 있으나 그 가운데 하나는 특정한 시기에 유행하는 우스개도 들어 있다.
한동안 세인들의 입에 버캐가 끼도록 유행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런 얘기가 떠돌았나 싶을만큼 까맣게 잊혀지는 ‘무슨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보기일 것이다. 참새 시리즈다 뭐다 해서 진짜 참새 입방아질 만큼이나 정신 없었던 시절이 있는가 하면 어느 땐가는 어느 배우 이름을 빌린 시리즈가 유행한적이 있었다.
최근에는 귀신이 죽자살자 따라 다니는 만득이라는 아이에 얽힌 시리즈가 유행하고 있는데 얼핏 들어도 아주 황당한 얘기에 불과하고, 극히 짧고 단순한 줄거리에다 그 시리즈라는 것이 거개가 비슷비슷하다. 솔직히 말해서 우습지도 않은 말장난일 뿐이다. 그런데도 제철 만난 메뚜기 마냥, 별로 웃고 살 일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크게 회자되고 있다. 그나마 속 없는 웃음이라도 주니 다행이라고나 할까.
시류에서 빚어지는 사회상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하는 사림들은 이런 내용 없는 우스개에서 당시의 세태를 읽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근 일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만득이 시리즈에서 읽을수 있는오늘의 세태는 무엇일까. 왜 몇 년 전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 잘난 김영삼 정부의 후반기에 하등 웃을 내용도 없는 우즈개가 세인의 입에 올려지고,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시리즈의 양적 풍성함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사회문화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이 시리즈에 함축된 사회적 의미를 밝힌 바는 없다. 그러나 대충 추정하건대 뭔가 과거보다는 진전된 정책을 펼 것으로 기대했던 현정부가 벌이고 있는 갖가지 추태나 실정 그리고 기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무한 시리즈입네 하고 이름은 그럴듯 하지만 실상은 아무런 내용도 없이 그저 말장난이 불과하고 뭔가 재미있는 웃음을 주리라 기대했지만 끝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만득이 시리즈나 현정부의 정책이 도토리 키 재기 만큼이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 뒤집기

지난 12월 16일 전두환, 노태우씨 등 이른바 ‘12.l2와 5.18사건’ 의 책임자들에 대한 2심 선고 공판은 현정부가 보여 준 또 하나의 황당한 우스개로 기록될 것이다.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는 전두환, 노태우 씨 등에 대해 “피고인들이 6.29를 수용해 권력 이양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관행을 탈피한 점을 감안해서….” 사형을 받았던 전두환 씨는 무기징역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던 노태우 씨는 17년으로 깎아주었다.
재판부의 말인즉슨, 우리 정치사에 있어 정권을 잡았던 사람들의 운명이 결국 비참하게 마감했던 실례를 갖고 있는 마당에 전두환 씨가 보여준 태도는 귀감이 된다는 것이다. 노태우 씨는 그 절대권력자의 마음을 돌리게 한 공덕이 재판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어쨌거나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결연한 의지가 고작 이쯤에서 결단나고 있는 판이다.
이들에게 부정한 정치자금을 바쳤거나 재벌들이 자금을 바치게끔 거간꾼 노릇을 했던 자들에게는 더욱 관대한 판결이 내렸다. 노태우 씨에 대한 비자금 제공과 관련된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총수들에게 재판부는 관대하게 집행유예를 선고하였고 한술더 떠 한보그룹의 총수에게는 면소와 무죄를 선고하였다. ‘인권의 보루’ 라고 하는 재판부가 정확하게 심리한 결과이긴 하겠으니 일 년 전 서슬퍼렇게 잡아들일 때 하고는 영 딴판이라 과연 공정한 재판의 결과인지 의심이 간다. 정말 정치적 개입이나 판단없이, 또는 앞으로 정해진 정치 일정과 관련하여 배려 없는 재판이었는지 묻고싶다. 이러다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충 사면조치로 석방하고 나서는 ‘화합의 정치’니 어쩌니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서글픈 우스개는 역사를 뒤집고 있다는 것이니, 바로 세우기는커녕 은근슬쩍 죄인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으며, 교묘한 조작으로 반민주화의 길을 가고 있는 정부와 재벌의 추태가 그러하다.
전두환, 노태우 등과 재벌들에게 관용을 베풀던 날 국회 정보위에서는 여당의 날치기로 안기부법의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본 회의에서 의결 절차가 남아 있긴 하지만 정부의 역사 뒤집기 한판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단서였다.
상임위에서 통과된 안기부법 개정안은 지난 94년과 95년 이 안의 합의로 안기부의 수시권을 제한한 이른바 개혁 과제법이었다. 그런데 올 여름 고정간첩, 한총련사건, 동해안사건 등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안기부에게 다시 이적행위 등에 대한 수사권을 주어야 국가의 안전이 위태롭지 않는다는 논리로 개정안을 만들어 기어이 이번 국회에서 확정지으려고 작정하고 나섰다.

들어올려야 한다.

여당이나 재벌들이 이번 국회에서 작당하여 기만극을 벌이고 있는 우스개 가운데 백미는 ‘노동관계법’ 이 될것이다. 비록 정부의 노동관계법 개정안에 대해 자본가들도 반대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본가들에게 더 유리하게 개정하자는 투정에 불과할 뿐이지 노동자들의 처지와는 정반대에있다.
한국의 노동관계법은 극우 분위기가 커진 상횡에서 만들어진 이래 지금껏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가 금지된 채 유지되고 있다. 그것도 노동자들어 목숨을 바쳐가며 노동관계법의 개정을 위해 싸워왔기 때문에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4월 정부는 ‘신노사관계구상’을 내놓으며 ‘참여와 협력’ , ‘교육중시와 인간존중’등을 근간으로 하는 노동법 개정을 선언했고, 사용자와 노동자 그리고 공익 대표자들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정부가 앞장서서 노동관계법을 개정하려고 하는 이면에는 국제무역기구의 출범, 경제개발협력위원회 가입 등 세계시장에서 통용되는 경제 규범을 따르기 위한 조치이다. 이미 국제노동기구 동은 한국정부에 대해 노동관계법을 개정할 것을 수차 요청하였고, 미국등 선진국에서는 부당 노동 행위에 대한 무역 장벽, 이른바 노동라운드라는 것도 제기하고 있기에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못해 개정작업에 나선 정부의 입장이고 보니 노동관계법의 내용이 어찌 되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할수 있으나 그래도 국제적 수준이 있는만큼 노개위의 활동에 기대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사관계개혁위에서 지난 7월 청와대에 보고한 법, 제도개선의 방향과 기본정신은 제쳐두고 엉뚱한 방향으로 정부안이 마련되었다. 이른바 ‘3금3제’로 대표되는 개선과제 가운데 노동자들어 요구하는 ‘3금-제3자개입금지, 복수노조금지, 정치활동금지-의 해제에는 복잡한 유보조항을 달아놓고 있으면서 지본가들이 주장하는 3제-정리해고, 변형 근로시간제, 파견근로제-는 보장하는 법안을 만들어 이번 정기국회에 상정했다.
정부가 자본가들의 의견을 충실하게 반영하여 제출한 법안에서 나오는 용어가 이미 노동자들의 발목을 잡는 것이라는 점은 쉽사리 알수 있다. 경영의 악화, 작업형태 변경, 산업구조 변화, 업종전환 등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을 때라는 막연한 상황이 되면 지본가는 언제든지 필요한 수만큼의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특하면 경제가 어렵네 사정이 좋지 않네 하며 노동자를 해고의 벼랑으로 몰아 놓는 것이 상투적인 자본가의 수작인데 이런 노동관계법이 통과되면 그야말로 자본가의 손에 철퇴를 쥐어 주는 격이 된다. 막말로 발가벗겨 놓고 채찍질해가며 부려 먹겠다는 심산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지난 8월말 국감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국민의 40퍼센트 이싱에 임대가구에 살고 있으며, 이들가운데 25퍼센트는 단칸방에 세들어 살고 있다. 화장실과 부엌이 없는 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은 3백만가구에 1 ,200만명이나 된다. 정부와 자본가들이 외채의 크기를 키울 때 그 한편에서는 가난에 찌들고 해고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에 달한다. 그런데도 숙인 고개 위에 더 큰 무게로 내리누르려 하고 있다.
전, 노씨 일당들이 재판받는 사진을 보니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현 정부는 무죄를 내리리라는 확신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정작 고개 숙여야 할 자들은 독사같이 머리를 빼들고 있는 판에 역사를 말 없이 굴려 오고 밀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고개 숙일 것을 강요하고 있다. 참을 만큼 참았어도 그들에 의한 서글픈 시절은 끝이 없다. 이제 새해 벽두에, 들어올리기 위해 다리에 불끈 힘을 주어야 한다. 잠시의 유행이 아니라 질리도록 끈질긴 힘으로 밀어 올려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