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색계無色界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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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고려대장경 - 최세영
1997년 01월 179호
한해 마무리는 토함산을 넘나들며 석굴암과 함께 했다. 불국토의 꿈을 서라벌 땅에 구현하려 했던 신라인의 숨결 속에 잠겼던 연말이었다. 서라벌 땅 동쪽의 신령스런 산중턱에 불국사를 조성하고 산 정상에 인공 석굴을 쌓아서 석굴암을 조성했던 신라인들.
석굴암은 네모진 전실일 통해 비도를 거쳐야 비로소 본존불이 모셔진 원형의 주실에 다다르게 된다. 원형의 주실, 그 작은 공간 안에는 우주 삼천 대천 세계가 다 담겨져 있다. 그래서 전실이 인왕상이 버티고서 있는 힘의 세계라면 주실은 지혜의 세계라고 부른다. 전실이 욕계의 세계이며 비도가 색계의 세계라면 주실은 무색계의 세계이다. 그민큼 주실 안에는 불교의 깊고 심오한 이치가 조화로운 비례 체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제석천을 비롯한 천신과 보살상 열 분의 부처님 제자들이 도열해 계신 세계. 무색계란 바로 물질을 초월한 세계를 가리킨다. 그런 수행을 닦은 이가 새롭게 태어나는 하늘 세계라고도 한다.
깊고 깊은 불심을 지니지 아니한 채 화강암을 도드라지게 새긴다고 무색계의 불보살상이 찬란하게 빛을 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석굴암 주실에 서서 심오한 불법의 세계에 젖어 석굴암을 조성했을 신라 장인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들 이름은 지금 단 한줄도 전하지 않는다.
그들의 무수한 땀방울, 그들의 순결한 영혼이 배어 있을 천삼백 년 전 신라의 돌을 매만지며 다시금 칠백육십년 전 고려인의 숨결을 떠올렸다. 고려대장경을 조성했던 무수한 장인들.
고려대장경판을 맨 처음 보았을 때 그 판각된 글씨의 섬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양각된 글씨체 한 글자마다 마치 생명을 부여받고 새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글자 한 자 새기고 삼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고려대장경판. 불심과 정성 없이는 도저히 이룰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상경각 안에 스며든 햇빛에 조심스럽게 경판을 비추어 보았다. 햇빛과 그늘이 대조된 글자의 판각 획들이 더욱 또렷이 살아나고 있었다. 짙은 먹빛의 글자에 드라워지는 깊은 그림자, 햇빛에 찬찬히 일렁이듯 밝아지는 글자의 표면, 둥그렇지만 무디지 않게 다듬어진 글자의 획, 부드럽고 둔중한 무게감과 기운찬 힘을 느낄 수 있는 서체가 먹빛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검지만 깊고 푸른 먹빛의 글자가 양각된 것이었다. 글자를 양각으로 파내어 가면서도 붓글씨의 획을 다치지 않고 섬세하게 새긴 각수들의 날카로운 조각도가 드러내고 있는 비인간지필非人閒之筆 신선지행神仙之筆, 사람어 쓴 글씨가 아니라 신이 쓴 글씨체가 이름 밝혀지지 않은 고려의 각수들 손끝에서 다시 한번 생명을 부여 받은 순간을 보여 주고 있었다. 고려대장경판을 새긴 각수들, 그들은 누구인가.
흔히 일반 경판에는 시주자며 경판을 새긴 내역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대장경판에는 그러한 기록이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경판을 인경했을 때 드러나지 않는 부분인 경판의 끝이나 한 모서리에 칠백육십 년 전 각수의 이름과 수결手結이 보인다.
극부, 득인, 득온, 양재, 금려, 가대, 현재, 천목, 대림, 인철, 지영, 전일, 혜광. 종목, 효운, 삼중, 박동, 수규, 왕필, 정순, 칠보, 득평, 덕혜… 그리고 자신들만이 알 수 있는 수결들.
대장경판에 새겨진 인명은 동일인이 여러 경과 권에 중복되어 있기도 하다. 연도도 여러 해에 걸쳐 있다. 또 예전도, 화수각, 재직각, 자온도 등 자신이 각수임을 나타내는 것들도 있다.
최근 각수의 성분을 분석한 영남대 검윤곤 박사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고려인의 전 계층이 고려대장경 조성에 참여한 불사였음을 알수 있다. 그들은 진사를 비롯한 문인 지식층, 지방 향리층인 호장, 하급장교에 해당하는 대정, 현직 조정의 관리, 비구, 화상, 사미 등으로 표시된 스님들까지 그 계층이 다양하다. 또한 이름 없는 민중이 각수로 고려대장경 조성에 참여해 박동, 최동, 사동(同. 혹은 童) 등으로 그 신분을 밝히고 있다. 당시에 ‘동’ 이란 이름은 총각을 가리키는 이두식 전통 표기다. 따라서 박총각, 최총각, 사총각으로 불리던 서민이 참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모두가 각수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다양한 신분의 고려 민중이 고려대장경에 참여했음은 분명한 일이다. 고려대장경 판각 초기인 1237년에는 모두 백삼십삼 인이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해에 판각된 「대반야바라밀다경」전 아흔다섯 권에는 십여 명의 각수 이름만 보일 뿐이어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각수가 더 많음을 알수 있다. 그래서 고려대장경 판각에 동원된 전체 인원의 숫자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전체 경판에 새겨진 이름 가운데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나타난 인원은 삼천육백 명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연인원 이만명쯤이 고려대장경 조성에 참여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동일인으로 보이는 이름이 무려 이백 장의 경판에서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햇수로 무려 십이 년 동안에 걸쳐서 판각 작업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는 이름도 보인다. 또 고려사 관련 역사서에 등장한 인물의 나이와 판각연도로 추정해 볼 때 팔십 세가 넘은 사람의 이름도 보인다. 이 경우 재보시했거나 판각에 참여했던 지녀가 부모의 이름을 새겨 넣었던 것은 아닐까.
이처럼 고려대장경 조성은 수많은 고려의 민중이 자신의 신분과 계층을 떠나서 참여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던 불사였다.
고려대장경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왜 전란의 와중에서 고려대장경을 만들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의문들은 어쩌면 쉽게 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려대장경은 바로 고려인들이 한마음을 모은 보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재물을 보시할 수 있는 이는 재보시로, 각을 할 수 있는 이는 온몸을 던져 고려대장경 조성에 참여하지 않았던가.
보시란 자신을 버리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자기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고려인들. 경판구석 한 귀퉁이에 작고 작은 이름을 새겨 놓았을 뿐인 사람들, 아니 자신의 이름마저 새기지 않었던 더 많은 숫자의 이름 모를 고려인들. 그들은 무색계의 사람들이었다.
전란 가운데에서 자신의 안일과 물욕을 남김 없이 버리고 자기 자신마저 떨쳐 놓았던 고려인들. 그들에게 있어 무색계는 결코 복덕을 닦아 죽어서야 갈수 있는 천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들은 고려대장경이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한자한자 공들여 새기며 전란의 현실 속에서 피안을 꿈꾸었던 무색계의 사림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