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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담그고 떡 치던 선지식들과 함께 정겨웠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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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고봉 1997년 01월 179호
사십 년도 훨씬 전 해인사는 하루종일 있어야 바깥 사람 하나 구경할 수 없었다. 그저 무심히 경내를 내리 찌르는 햇살과 지나가는 바람에 탱강 거리는 풍경소리, 밤이면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가 해인사를 찾는 객이었다.
지금은 어디 그런가 평일, 공휴일을 막론하고 해인사는 늘 관광객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하다. 해방과 육이오 전쟁 사이에 해인사로 출가해 두 해 남짓 행자생활을 할 적에는 그저 마당에 앉아서도 우물가에서도 잔디밭에서도 참선을 했다. 해인사 서디를 가봐도 낯선 사람은 보이지 않아 신경쓸 필요도 없었거니와 구참 선객들은 물론 행자들에게 참선은 그렇듯 일상적이었다.
그 시절은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행자 교육을 따로 받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선지식틀의 일상을 눈으로 보고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다. 정화 전이니 대처승과 비구 스님들가 해인사에 같이 있었다. 관음전과 퇴설당, 선열당에서는 비구 스님들이 살았고 현당과 그밖의 건물에서는 대처승들이 살았다. 비구 스님들이 머무는 곳에는 선원과 강원이 함께 있었는데, 밥짓고 국 끓이고 찬 만들며 종종 걸음을 치다가도 퇴설당 울 넘어로 대중스님들을 훔쳐보면 맑은 눈빛으로 앉아있는 모습이 신선이나 다름없었다. 단아한 모습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스님들을 뵈면 신심이 절로 솟곤 했다.
그 시절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는 규칙이나 잔소리도 없었다. 그저 큰스님틀의 일상을 보고 ‘아, 이렇게 사는 거구나’ 하고 따라 했을 뿐이었다. 목소리 큰 스님은 대접도 인정도 받지 못할만큼 모두 조용조용한 말소리여서 바깥사람도 드나들지 않던 해인사 경내는 태고의 정적이 늘 감돌았다.
점심 공양을 하고 나면 큰스님네는 물론 수좌 스님들 강원생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밭을 매는 울력을 했다. 밭에서 나는 채소로 찬을 만들던 시절, 효봉스님, 청담스님, 구산스님 등 큰스님들이 나와 씨 뿌리고 밭 매고 거둬들이고 했다. 소임을 짤 때면 공양주 소임을 서로 하겠다고 나섰는데 물론 큰스님들도 자청하고 나섰다. 어쩌다 그 분들에게 공양주 소임이 돌아가면 황토로 빌라놓은 부뚜막은 늘 새로 바른 것처럼 말끔했고 불기들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채소를 뽑아다 놓으면 누가 했는지 어느새 말짱히 다듬어 씻어져 있었고, 먹이라도 치는 날이면 큰스님들이 모두 나와서 일하는 날이 되었다. 팔을 걷어부치고 떡을 치고 썰던 큰스님들의 손놀림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느낄 수 있었다. 간장을 담그는 일은 물론 손수 나물을 뜯어다 가마솥에 삶아바싹 말린 다음 짚으로 엮어 천장에 매다는 일도 선방 큰스님들과 대중들이 함께 했다.
침묵 속의 맑은 눈빛과 조용한 발걸음 하나 하나에서 배어나오는 구도에의 열정을 읽으며 중물을 들어던 시절이었다.
어느덧 이순을 홀쩍 넘어 노장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되고 출가한 지 쉰해 가까이 되었지만 그 때처럼 큰스님들과 대중의 거리가 가까웠던 적도, 큰스님들이 마치 할아버지처럼 편하게 느껴지고 그 분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신심났던 시절은 없었다. 참으로 말이나 글로서가 아닌 행으로 익혔던 소중한 선지식들과의 만남이었다.
불연이 깊어서인지 어디에 도인이 있다는 소리만 들리면 귀가 번쩍 뜨이던 소년시절,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돌아온 친구의 사촌 누이에게서 ‘해인사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말 없이 도를 닦고 있다’는 얘기에 발심을 했다. 중이 된다기보다 도를 닦아 도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친구의 누이가 들려 준 부처님의 일대기나 육조 스님의 얘기는 불교에 아무런 정보가 없던 내게 그렇게 신비스러울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도 공부해서 뭐할 거냐’하며 펄쩍 뛰셨다. 마음은 이미 해인사에 가 있었으니 그 분들의 반대가 귀에 들어올리가 없었고, 몇 번 말씀을 드려도 허락하지 않아 어느날 그냥 집을 나와버렸다.
해인사에 와서 밥하고 국 꿇이고 도량 청소하며 행자 노릇을 하면서도 오로지 도 닦을 일념으로 퇴설당이나 선열당을 기웃거렸고, 그저 아무데서나 선방에 계신 스님들을 흉내내어 가부좌를 틀곤 했다. 염불을 배우라고 하는데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수좌라도 수좌불공은 할 줄 알이야 된다고 해 안하고 버티다 결국 일 년이 지나서야 염불도 배우고 경도 익혔다.
강사 스님께서 천수경을 가르쳐 주며 외워 오라고 하는데 금방 외워졌다. 「반야심경」을 하루에 다 익히고 외우니 강사스님이 ‘어디서 중노릇하다 왔느냐’고 물었다. 「초발심자경문」을 닷새 만에 배워 익히는 나더러 강사 스님은 천재라고 했다. 해인사에 오기 전 마실에서 사서까지 익혔던 터라 반 문리는 난 셈이었으니 기실「초발섬자경문」이나 「치문」쯤은 문제가 안 되었던 것이다. 행자가 예닐곱 명 되었는데, 내가 공부하는 진도가 빠르자 독선생을 두고 공부하는 호사 아닌 호사를 누리게 되었는데, 이런 나를 보고 어느 중진 스님께서 ‘내 상좌하면 대학보내 공부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으나, 어쩐지 그 때는 도만 닦으면 되지 꼭 중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행자시절을 보내던 때의 해인사는 참으로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농사지을 땅이 있었으나 대부분 대처승들이 관리를 했으므로 탁발과 배급을 받아 식량을 조달했다. 지금은 차들이 안올라오는 데 없이 편리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차가 가야까지만 와 배급 식량을 그 곳까지만 운반해주고는 돌아갔다. 그러면 모든 대중이 그리로 나가 쌀을 한두 말씩 지고 들어와야 했다. 어깨며 등짝이 빠져나갈 듯했으나 돌아와 된장찌개 끓여 공양하면 꿀맛같이 맛있던 때가 마치 어제처럼 새롭다.
한창 먹을 나이였으나 먹을 거리가 모자라 그 때는 늘 허기져 있었다. 사람 수대로 쌀을 되어 내 밥을 지으니 객스님 한 둘이라도 오는 날이면 그러잖아도 엉성한 밥공기가 밑으로 더 주저 앉아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곤 했다. 얼마나 배가 고픈지 머리까지 지끈대던 어느날, 사람수를 슬쩍 올려 쌀을 되어 내 밥을 짓곤 한꺼번에 세 그릇을 먹어치운 적도 있다.
그 때는 김치를 염조鹽祖, 곧 소금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김치 한 쪽 가지고 밥한그릇을 다먹었으니 얼마나 짰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도라야 촌 사람들뿐인 데다 차까지 다니지 않았으니 과일 한쪽구경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춥고 배고플 때 발심한다고 했던가, 한평생 선객으로 살아왔어도 그 때처럼 모든 스님들이 눈 푸르게 정진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큰스님들은 물론 그 때 같여 있던 모든 스님들 얼굴이 하나도 잊혀지지 않고 지금도 선연히 떠오르니 허기져 배는 곯았으나 모두 가족처럼 따뜻이 지내던 시절이었다. 어느 길거리에서 안면이 없는 스님을 만나도 형제를 만난 듯 반가웠고, 누군가 출타했다 돌아와도 그렇게 새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마도 물욕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던 시절이기에 가능했지 싶다.
옷 한벌에 금강경 한권만을 지녔던 무소유의 삶, 누구도 따로이 절하나 갖지 않았던 선지식들을 가까이 모시며 살던 행자시절 두 해는 어느시절보다 행복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