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 경기도 남양주의 봉선사로 출가한 뒤로 법랍 스물다섯 해가 넘는 의정스님에게 한결같이 최상의 도반이 되어 준 차였다. 이능회는 차나무를 사군자의 덕목을 갖춘 초목 성현에 비유했으니, 맛과 향과 색이 현묘하고, 또한 수행자에게는 귀한 약효를 베풀어 주니, “차는 산란한 마음을 달래어 고요하게 하고 지혜의 씨앗을 키워 준다고 한 부처님의 말씀과도 한가지가 되는 것이었다. 마셔서 끝난다면 그저 한 잔의 차일터였다. 그러나 옛 선사들은 그것을 차선일체로 승화시켜 차와 선이 둘이 아니게 하였으니, 의정스님은 해인사 강원 시절의 학인 때부터 그 경지에 이끌리어, 대흥사 일지암의 여연스님과, 인사동에 있는 전통불교문화원의 선혜스님 등과 어울려, 현대 다도의 중흥조라 할 다솔사의 최범술 스님에게 직접 다도를 가르침 받은 바 있었다. 차를 좋아하는도반들과 교유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라 겸양하나, 그의 차에 대한 경지는 수승한 바가 있어, 주위어 서 그를 “차스님”으로 일쑤 일컽한다.
그러나, 차를 기르고, 법제하고, 음다하는 과정에서 깍듯한 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으나 그에 휘둘리는 바는 없다. 까다로운 다법이 지나치게 존숭되어 차 자체가 사라지고 말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의정스님은 차선일여를 주장하나, 번다하게 차례를 지킨다기보다 격식에 매이지 않는 선다 생활을 즐기는 편이다. 차는 군자와 같아서 삿된 기운이 없으니 벗으로 삼을 만한 것이다. “스스로가 성현에 미치지 못하니”이상으로 삼는 것들이 엿보이는 “성현 초목”을 곁에 두고 더불어 살면서 자족할 따름이다.
의정스님은 해인사 강원 과정을 마친 뒤로 지체없이 선방에 들어 본분사 밝히는 일에 몰두했다. 용화사, 송광사, 불국사, 봉암사, 통토사, 범어사, 동화사, 정혜사(수덕사) 등 제방 선방을 전전하는 동안에 친견한 선지식은 허다하였으나 그 가운데서도 그의 믿음을 크게 일으켜 준 스승은 용화사의 송담스님이었다.
강원을 졸업한 이듬해에 찾아간 그 곳은 산중 절도 아니고, 아파트 단지와 공장지대가 인접해 있는 수행하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닌 데였다. 그러나 전강스님의 전법제자인 송담스님을 모시고 대여섯 해나 살았다. 그리고 “힘을 얻게 했던”그 곳을 떠나서도 일쑤 찾아봐옵고 가는 길을 여쭈니, 그 곳에서 실제로 머문 기간을 따져보는 일은 부질없는 일일 터였다. 송담스님에게서 배운 바는 어떤 것이었는지 말로 구태여 물었더니 의정스님은 “원래 무소득이요.”했다. 말로써 얻지 못할 바를 두고 말로 가늠해 보려는 처사를 꾸짖는 것일 터였으나, 길 끝에 이르지 못하고 길 기운데서 서성대는 중생은 또 그 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모르는 체하고, 버리는 일 배우셨느냐고 재우쳐 물으니 의정스님은 대답이 없다. 그저 이 길이니 이런 방법이 옳다는 주장도 없고, 제자의 근기만 헤아려 주셨다고 했다. 다른 말끝에 한, 출가하려는 이에게 의정스님이 들려 줄 말이란 그저 분分(몫)에 따라 얻을 바이니, 말릴 일도 부추길 일도 아니란 말과 일맥하는 것이리라. 말길도 생각길도 끊고 오직 의정 하나만 드러내려는 가운데, 용심用心이 급했던가, 그는 남달리 혹독한 상기에 서달렸다. 병원에서도 포기하는 지경을 두어 번 넘나들다가 간신히 회생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몸이 말끔하지는 않다. 그가 상기병을 극복하는 데에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방법은 연성법이라는 일종의 호흡법이었다. 일본의 백은이라는 선사가 쓴「야선한화夜船閑話」라는 책 속에 소개된 것이다. 그 또한 상기병에 시달리다가 도인을 만나 낫게 된 뒤로 그 내용을 책으로 써 낸 것이라 했다.
상기는 납자에게 치명적인 것이다. 좌복에 더 이상 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기란 의욕이 앞서서 생기는 것이겠으나 그런 치열한 의욕 없이는 도를 이루가 힘든 일이니 낭패였다. 옛날에는 납자들의 셋 가운데 하나가 그 낭패 지경을 겪었다고 했다. 참선 수행이야말로 살 길이요, 그 길로 나서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산문에서 한결같은지 알 수가 없다. 아니, 날로 예만 못해져 간다고 의정스님은 생각한다. 스스로도 그래왔듯이, 가장 이상적인 수행 방법은 선방에서 여럿이 함께 정진하는 것이라 그는 생각한다. 공부가 웬만큼 된 사람도, 토굴에 혼자 살게 되면 사견이나 독선에 빠질 위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요즘 선방은 전통이나 가풍 같은 것이 많이 사라져 예전 같지않다. “예전 습이 백여 있는” 그는 이런 요즘 풍토에 적응이 잘 안 된다. 어른들도, 한두 철 바짝 정진하다, 하루 종일 좌복에 앉고 싶은 마음에 시간 맞춰 앉아야 하는 대중살이가 불편해지거든 토굴에 한번 나가 살아도 좋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것을 핑계 삼았다. 나이 들었어도 옛날처럼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그 욕심에 토굴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토굴살이란 “근기가 약한 사람의 병통” 이라고 의정스님은 생각한다.
그가 택한 곳은 전라남도 장홍이었다. 물길도 땅길도 중앙과 멀어 이 나라에서 “가장 외진 곳” 이라 이를 만하니 유배지로 적격이었고, 역사가 그러했다. 두 해 전에 이 곳 봉선사로 오기 전까지, 한 삼년 살았다. 옛날괴는 달리 길이 많이 나기는 했으나, 지나치는 걸음은 물론 부러 찾아오기도 힘든 그 곳에서 동선을 많이 했다.
그가 동선에 뜻을 둔 것은 죄복에 앉은 지 십 년쯤 되었을 무렵부터였다. 촤선이 글자 그대로 앉아서 선정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동선은 움직이면서 선정에 드는 것인데, 포행뿐만 아니라, 공양 짓고, 소제하고, 풀을 매는 등 일상사 가운데서, 일체시 일체처로 염념히 화두를 짓는다. 좌선이 어지간한 경지에 이르러도 동선은 쉽지 않으니, 몸을 쉬지 않는 채로 선정에 들기란 몸을 고요히 두고 마음만 찾는 길보다 한수 위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도 그에 따라 움직여 흐트러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 토굴에서 얼굴도 꼭 닮아 친동생 아니냐는 말도 곧잘들은 상좌 하나와 둘이 살았다. “상좌 하나에 시봉하나” 라는 산중말도 있거니와, 상좌 두기란 또 다른 인연 짓기일 터였고, 제 수행에도 별무 이익일 듯하여 마뜩찮았으나, 그를 찾아와서 펼쳐 보인 참선에의 뜻이 진실되고도 간절히 보여 물리치지 못했다. 결제철이면 선방을 가고, 해제철이면 그의 곁에 머무는 그 상좌와 함께 차를 길러 따고 채소를 가꾸었다.
뒤에는 사지산어라 이르는, 명색이 산인 야트막한 구릉이 있으나 들 한가운데 자리잡은 곳이나 진배없었다. 토굴에 바투 붙어 있는 민가는 없었으나 곁에 저수지가 있고, 보이지는 않으나 이십 리 밖에 바다가 있어 아침 나절에는 자주 안개가 끼었다. 공기가 습하고 따뜻하니 무엇보다 차를 가꿀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제가 먹을 만큼만 가꾸었다. 준다커니 달라커니 하는 발길이 이어져 정진이 방해받을 만큼 번거로워져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차는 절기가 곡우일 때, 양력 오월 초순쯤에 따야 한다. 아침 열시쯤까지 걷히지 않는 안개 속에서 움터 오르는 차잎을 바라보면 환희심이 절로 났다고 했다. 의정스님은 침착하고 고요하면서도 어둡지 않다. 말로 이룰 일 아니니 긴말도 군말도 자연히 줄어 말수가 드물고, 그마저 두 마디도 이어지기 힘드니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는 마주앉은 자리가 쉽지 않다. 그의 수행에 대한 일관된 태도와 엄정한 일상을 흠모하여 어떤 결사체에서 일을 함께 도모코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막역한 사이인 그 스님은 오밤중에 의정스님에게 전화를 걸어 막역하게 공박하였다.
“너만 고고하게 살 태냐.”
그가 도모하려는 “신불교운동”의 뜻에 대해서는 동의하나, 자신은 “바깥 일에 동참할 정도의 근기”는 아니라고 판단한 때문이다. 본분대사를 위해 몸을 바친 뒤로 나이 마흔을 넘기고 보니, 자신의 그릇은 “금생에는 정진만 일관하는 것”이었다. “차만 마시고 은둔자적할 테냐”고 누가 딴지를 걸어와도 대은大隱은 시정은市井隱이라 하였으니 , 자신은 그저 “대은” 아닌 “소은” 일 따름이라고 받아넘긴다. 그러나 그 말대로라면 그는 지금 대은 중이다.
수좌 스님인 그가 지금 맡고 있는 소임이 말사가 일흔 개쯤이나 되는 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부주지이기 때문이다. 주지이자 조실인 은사 운경스님은 세수가 아흔이 넘어 실제 살림살이는 그가 맡아보고 있다.
현재 맏상좌격이 되어 있는 그가 그 동안 선방 다닌답시고 인사치레도 못하고 실아온 처지임이 못내 면구하여 은사 스님 시봉차 맡은 소임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도 관리에, 재산 관리에, 불사에, 포교에… “대단한 보살”아니면 어림없는 소임살이라, 한숨이 절로 나오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니 어찌 대은 중이 아닐까 보냐. 게다가 두 해 전 이 곳에 온 뒤로, 월운스님을 교수로 모시는 능엄학림을 열어 운허스님 이 래의 교종갑찰로서의 이름값을 하게 했고, 규모가 만만찮은 불사도 벌이어 도반들로부터 “굼뱅이도 뒹구는 재주가 있음”을 인정받았다. 「논어」의 “자는 불기不器” 란 어귀는 그에 어울리는 말일 듯하다.
운경, 월운, 밀운스님 들을 어른으로 모시고 스물댓 명 되는 대중들과 의논을 모아 일을 치러 나가니, 법랍에 비해 과중한 듯해 보이는 소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넘치는 바가 없다. 대중의 뜻을 따르고 그 기호에 맞추면서도 제 중심을 잃지 않으니, 모난 것에는 모나게 대하고, 둥근 것에는 둥글게 대하는, 불기不器라는 군자의 본래 면목을 보여 주는 것이다. 차의 색과 향과 맛과 기운이 흰 백지와 같아서 두루 어울리면서도 본디 성품은 잃지 않는 것이 불기의 뜻이다.
서울과 멀지 않은 이 곳 봉선사에는 초하루와 보름의 법회에 이삼백쯤의 신도가 모인다. 그러나 의정스님은 법문을 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많이 계시니 차례가 오지 않아 그럴 뿐이라지만, 법문을 하다보면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습이 생긴다더라는 말에서 그의 속셈이 엿보인다. 이 곳에서 열리고 있는 불교교양대학에서 참선에 대한 강좌만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이 아닌, 옛 조사들의 말씀만 전할뿐이다. 그를 마주할 기회가 적어서인지 그를 찾는 신도들은 이 부주지 스님이 어렵기만 하다. 그 역력한 어려움을 녹여 보려고 스님은 부러 농담도 놓아보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현상에 관심 없는”그가 숨길 수 없이 내뿜는 기운 때문일 것이다.
선방을 전전하던 십 년 전쯤에 화두의 의정이 다 풀려서 송담스님을 찾아가 뵈오니 “아직 미흡하니 더 정진해라”하셨다. 그랬으나 그에게는 아직 밤을 도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 일이 많아서 봉선사에서는 동선도 하지 못하고 있고, 그저 틈나는 대로 포행만 할뿐이라 하였다.
의정스님은 형편이 닿는 대로, 삼십 분짜리, 한 시간짜리, 두 시간, 다섯 시간짜리로 뒷산인 운악산에 오른다. 누구와도 함께 갈수 없는, 푸른 산빛 깨치며 혼자가는 길일터였다. □